[ 목 차 ]
□ 유럽 지도
□ EU(European Union) 회원국
□ 서유럽 여행코스 (영국,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독일) : 11박12일(2011.7.2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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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국 지도 및 역사
2. 관광 지도
3. 시내 풍경
4. 국회의사당 & 빅벤
5. 웨스트민스터 사원
6. 버킹엄 궁전 & 근위병 교대식
7. 트리팔가 광장
8. 피카델리 광장
9. 하이드 파크, 앨버트공 동상 & 로얄 앨버트 홀
10. 타워 브릿지
11. 대영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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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지도
EU(European Union) 회원국(27개 국)
서유럽 여행 코스 (영국,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독일) : 11박12일(2011.7.2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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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국 지도 및 역사
1) 영국 지도
2) 영국 역사
유럽 서쪽에 있는 잉글랜드, 스코트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로 이루어진 섬나라 영국의 형성과 발전에 관한 역사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영국은 일찍이 원주민, 켈트족, 로마인, 앵글족, 색슨족, 바이킹, 노르만족 등에 의해 수 세기에 걸쳐 혼합된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16세기부터 급속히 발전해 강국으로 성장했다. 특히 의회정치와 산업혁명으로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1801년에 잉글랜드, 스코트랜드, 웨일스의 통합 왕국에 아일랜드를 포함한 연합 왕국(United Kingdom)을 형성했다. 나중에 남아일랜드는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18세기와 19세기에는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인도 등에 식민지를 건설해서 전세계의 1/4을 차지하는 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 식민지의 독립과 자치권 획득으로 제국는 해체되었다.
(1) 고대 영국의 형성
① 선사시대
고고학자들은 영국이 유럽과 이어져 있던 약 50만년 전에 원시인류가 영국으로 건너갔으나, BC 7만년 경의 빙하기에 모두 사라지고 이후 현생 인류가 건너간 것으로 본다.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빙하가 녹자 BC 5000년경에는 영국과 대륙을 연결하던 육지가 물에 잠겼다. BC 4000년경에는 대륙에서 신석기 문화를 가진 이주민이 들어왔다. 이들은 시장이나 회합장소로 헨지(henge; 석조를 활용하여 만든 거대한 원형모양의 축조물로서, stonehenge가 대표적임)를 조성하였으며, 무덤과 같은 거석기념물을 만들었다. 이것은 수학과 천문학에 대하여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BC 3000년부터 BC 2500년 사이에는 네덜란드, 에스파냐, 포르투갈에서 구리를 사용하는 민족이 들어왔다. 청동기인은 바퀴와 쟁기를 사용했고, 부유한 계층이 통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BC 700년 이후 켈트어를 사용하는 민족이 철기를 가지고 영국으로 들어왔다. 켈트족은 우두머리 전사가 통치했고, 요새와 집을 짓고 가축을 길렀다.
② 로마시대
로마는 카이사르가 BC 55년과 54년 두 차례에 걸쳐 켄트에 상륙한 뒤에 100년이 지나서야 남부지역(지금의 잉글랜드)을 점령하였다. 그 뒤 이 지역은 350년 동안 로마의 속주였다. 서기 120년경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픽트족(로마시대부터 10세기까지 스코틀랜드 북부와 동부에 거주하던 부족)을 비롯한 다른 부족의 침입을 막으려고 잉글랜드 북부에 솔웨이만에서 타인강에 이르는 장벽(하드리아누스의 벽)을 쌓았다. 로마가 점령지에 건설한 도시에는 포룸이라는 시장이 있었고, 그 주변에 공회당, 목욕탕, 신전 등이 있었으며 나무나 벽돌로 집을 지었다.
4세기에는 독일에서 온 색슨족이 브리튼 섬의 남동부 해안을 약탈했고, 368년에는 픽트족이 하드리아누스의 벽을 대부분 파괴했다. 5세기에 색슨족, 앵글족, 주트족 등 게르만족이 침입해 로마 문화를 파괴했기 때문에 브리튼 섬에는 로마 문화의 잔재가 거의 남지 않았다.
(2) 중세 영국의 발전
① 앵글로색슨시대
앵글로색슨족은 영어의 기초를 이루는 독일어에 속한 언어를 사용했다. 초기에 대부분의 앵글로색슨족은 자연신을 믿었으며, 켈트족이 사는 지역에만 크리스트교가 남아 있었다. 590년경에 아우구스티누스가 남부의 앵글로색슨족을 개종시킨 후 50년 동안 로마수도사들이 앵글로색슨족을 개종시켰다. 그래서 켈트족 크리스트교와 로마카톨릭이 공존하다가 휘트비 종교회의에서 켈트족이 교황의 최고권을 받아들였다.
앵글로색슨 문학의 초기 형태는 시였는데, 이 시기를 대표하는 서사시는 8세기 경에 쓴 <베어울프>로서, 이는 백성들을 보호하려고 용을 비롯한 괴물과 싸우는 왕을 묘사하였다. 산문으로는 신학자이자 역사가인 비드의 <영국 교회사>가 유명하다.
② 바이킹의 침입
8세기말에 덴마크 출신 바이킹이 잉글랜드와 웨일스를, 노르웨이 출신 바이킹이 스코트랜드와 아일랜드를 침입했다. 특히, 노르웨이 출신 바이킹인 데인족은 870년까지 웨섹스를 제외한 모든 왕국을 정복했다. 그러나 웨섹스와 앨프레드 대왕이 데인족의 침입을 막고, 그들을 크리스트교로 개종시켜 데인로(Danelaw)라는 지역에만 거주하게 했다. 1016년에는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인 크누크가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크누트가 1035년에 죽고 제국이 무너지자, 에드워드 참회왕이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에드워드 참회왕이 죽자 웨섹스 백작 고드윈의 아들 해럴드가 왕이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 1세는 에드워드 참회왕의 먼 친척인 자신에게 왕위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1066년 10월 14일에 벌어진 헤이스팅전투에서 해럴드 2세는 윌리엄 1세에게 패했다.
③ 노르만 정복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의 해럴드 2세 왕을 죽이고, 영국을 정복하여 1066년 노르만 왕조를 창건하였다. 그는 노르만식 봉건제도써 통치하며 집권적 봉건국가의 기초를 다지는 등 영국을 체계적으로 재조직했다. 윌리엄 1세는 세금을 징수했으며, 봉신에게 토지를 하사했다. 그 대가로 봉신은 기사로서 군사적 의무를 제공해야 했다. 이 같은 토지와 군사적 봉사가 결합된 토지보유형태를 봉건적 보유라고 한다. 봉건제는 앵글로색슨시대부터 있었지만, 노르만족의 지배 아래서 더욱 조직화되었다. 1086년에 관리들은 과세자료로 활용하려고 각 장원의 소유자, 규모, 가치를 조사해 둠즈데이북을 작성했다. 윌리엄 1세의 아들인 윌리엄 2세와 헨리 1세도 강력한 통치를 계속했다.
그러나 헨리 1세가 죽은 뒤에 내란을 거쳐 헨리 1세의 외손자 헨리 앙주가 헨리 2세로 왕위에 올랐다. 헨리 2세는 프랜태저넷 왕가를 열었다. 헨리 2세를 이어 1189년에 즉위한 리처드 1세는 십자군원정에 참여해 국고를 낭비했고, 동생 존 왕은 봉신들과 충돌하고 프랑스 내의 잉글랜드 영지를 많이 잃었다. 한편, 존 왕이 권력을 남용하고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자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려고 1215년에 왕에게 귀족의 요구사항을 담은 대헌장을 승인하게 했다. 존의 아들 헨리 3세 때 몽포르가 반란을 일으켰다. 몽포르는 봉신과 주교들이 국사를 논의하는 자리에 최초로 시민을 참석시켰다. 이것은 나중에 의회의 발전을 가져왔다. 헨리 3세의 후계자인 에드워드 1세는 반란을 분쇄하고, 중요한 법률을 통과시켰으며, 의회 발전에 공헌했다. 1295년에 소집된 모범의회는 각주에서 2명의 기사와 각 자치시에서 시민대표 2명을 소집해서 성직자-귀족회의에 참석하게 했다. 그리고 1282년에는 웨일스를 합병했으며, 잠시 스코트랜드를 지배하기도 했다. 에드워드 1세의 아들 에드워드 2세는 귀족들에게 밀려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때 영주는 국왕의 봉신으로서 장원을 가지고 있었다. 장원의 토지 일부는 이동이 자유로운 자유농이 경작했고, 나머지는 이동이 부자유스러운 농노가 경작했다. 장원의 경작지는 삼포제로 이루어졌고, 윤작을 했다. 경작지 바깥으로 공동방목지가 있었다. 겨울에는 목초가 부족했으며, 농민은 가을에 가축을 도살해서 소금에 절여 저장했다. 마을마다 교회가 있었고, 도시마다 주교구가 있었다. 교회는 많은 영지와 장원을 소유해서 부유했으며, 교회와 국왕은 주교 서임권을 놓고 투쟁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국왕의 자문회의가 최고 재판소였다. 한편, 노르만족 토지보유자들은 각기 자신의 법정을 갖고 있었고, 교회도 교회 법정이 있었다. 앵글로색슨 법에서는 재판을 받는 사람이 결백하다고 믿는 사람이 선서를 해주면 무죄가 입증된 것으로 간주했으며, 죄가 있는 사람은 시죄법(試罪法; 물과 불 등을 사용하여 죄를 가리는 중세의 재판법으로, 재판의 결과는 오직 신만이 알 수 있다하여 신명재판이라고도 함)으로 재판받았다. 시죄법은 13세기에 배심원 재판으로 대체되었다. 헨리 1세는 형사재판에 대한 왕의 통제를 강화하려고 법정에 국왕의 관리를 파견했다. 헨리 2세는 국왕법정을 열기 위해 지방에 순회재판관을 파견했다.
④ 백년전쟁과 장미전쟁 및 봉건제의 쇠퇴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내의 영토를 회복하려고 프랑스와 전쟁을 시작하였다. 백년전쟁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휴전과 전쟁을 되풀이하면서, 116년 동안 단속적(斷續的)으로 계속되었는데, 그 원인은 영국이 프랑스 내의 영토를 회복하려는 데 있었다. 전쟁 초기에는 영국이 우세했으나, 1429년에 잔 다르크가 프랑스군의 사기를 높이자 영국군은 잔 다르크를 생포해 1431년에 화형했다. 그러나 잔 다르크 처형 이후에도 프랑스는 계속 승리를 거두어 칼레를 제외한 모든 영토를 회복하고 1453년에 전쟁을 끝냈다.
백년전쟁이 끝난 지 2년 뒤에 랭커스터가(家)와 요크가(家)가 왕위계승권을 놓고 장미전쟁(1455~1485)을 일으켰는데, 랭커스터가가 붉은 장미를, 요크가가 흰 장미를 각각 문장(紋章; 국가 또는 일정한 단체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표시)으로 삼은 것에서 그 명칭이 유래되었다. 1461년에 워릭 경이 이끄는 요크가는 랭커스터가의 헨리 6세를 쫓아내고, 자기 가문의 사람을 에드워드 4세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그 뒤에 즉위한 에드워드 5세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숙부인 리처드 3세로 왕위에 올랐으나, 지지를 받지 못했다. 1485년에 랭커스터가의 헨리 튜더가 군대를 이끌고 웨일스에 상륙해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에게 승리해 헨리 7세로 왕위에 오르면서 장미전쟁도 끝났다.
한편, 오랜 기간 동안의 전쟁으로 전술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장기간의 전쟁은 많은 병사를 필요로 했고, 장궁을 가진 병사가 중무장한 기사보다 훨씬 효과가 있음을 입증했다. 따라서 국왕은 군사적 봉사보다는 용병과 무기 구입에 필요한 돈을 더 요구하게 되었다.
12세기 초부터는 장원 보유자 가운데 부역 대신에 돈으로 지대를 지불하게 하는 사람이 생겼고, 영주는 이 돈으로 노동자를 고용했다. 그런데 14세기부터는 15세기에 흑사병이 만연하여 영주는 노동력이 부족하고 직영지 경영이 손해라고 생각하고 농민에게 토지를 임대하거나 노동력이 적게 드는 목양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여전히 농노에게 노동을 강제로 시키는 영주도 있어서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1351년에 의회는 농업 노동자의 임금을 동결하는 노동자조례를 통과시켰다. 이 법에 대한 불만으로 1381년에 와트 타일러가 잉글랜드 남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중세 잉글랜드의 주요 수출품은 양모였다. 그러나 1336년에 에드워드 3세가 양모산업을 발전시키려고 플랑드르에서 기술자를 데려온 후에 양모수출은 쇠퇴하고 모직물 수출이 증가했다. 교역의 발전은 도시의 성장을 가져왔다. 도시는 국왕이나 영주에게서 특허장을 받았다. 도시민은 특허장으로 봉건적 부담에서 해방되고 자치권을 얻었으며, 길드를 형성하여 상업과 공업의 발전을 기하였다.
(3) 절대주의와 영국혁명
① 튜더왕가
튜더왕가는 평화유지를 바라는 새로운 중간계급인 상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귀족세력은 장미전쟁으로 약화되었고, 중간계급 출신관료가 왕권을 강화했다. 헨리 7세는 튜더왕가 발전의 초석을 닦았고, 성실청을 세워 봉신들의 사병소유를 금지했다. 세금 징수를 엄격히 하고 부자에게 대부받아 재정을 확보했으며, 치안판사를 통해 지방행정을 통제했고, 대외정책에도 성공을 거두었다. 1541년에는 아일랜드 의회가 헨리 7세를 아일랜드의 왕으로 받아들였다.
헨리 8세는 교황에게 이혼에 대한 동의를 얻지 못하자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1534년에 의회는 영국 교회에 대한 교황의 권리를 폐지하고, 헨리 8세를 영국 국교회의 우두머리로 하는 수장법을 통과시켰다. 헨리 8세가 신교에 우호적이지 않았으므로 예배식에는 별로 변화가 없었다. 1530년대에 헨리 8세는 수도원을 해산하고, 그들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해 재정을 확보했다.
1547년에 헨리 8세의 아들 에드워드 6세가 즉위했다. 그 뒤 에드워드 6세가 16세의 나이로 죽고 즉위한 메리 1세 여왕의 치세동안 프로테스탄트 300여명이 화형당했다. 그래서 메리 1세를 `피의 메리'라고 부른다. 1558년에 메리 1세가 죽자,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왕위에 올라 가톨릭교회로의 복귀를 철회하고 영국을 해상강국으로 만들었다.
엘리자베스 1세 때 영국은 번영의 시기였다. 직물업자들은 선대제(상인이 원료와 자본을 투자하여 수공업자에게 물품을 생산하도록 하는 것)를 이용해 직물업을 확장시켰다. 이에 따라 양모값이 오르자 몇몇 지주들은 소작인을 쫓아내고 목양장을 만들었고, 쫓겨난 소작인들은 빈민으로 전락했다. 1601년에 의회는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려고 ‘빈민구제법’을 통과시켰다.
헨리 7세 때부터는 인도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도록 지원했고, 해군력을 증강했다. 엘리자베스 1세 때에는 많은 선원이 새로운 인도 항로를 발견하려고 했으며,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식민지와 교역했다. 또, 서아프리카의 노예무역에 종사하기도 했다. 1567년에 호킨스가 에스파냐 선박에 공격을 당한 뒤 잉글랜드와 에스파냐의 적대관계는 전쟁으로 발전했다.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는 무적함대를 이끌었으나 잉글랜드의 해군에 패했다. 영국 선원들은 탐험을 계속해서 17세기 초에는 북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개척하였다.
② 영국혁명
엘리자베스 1세가 죽자 사촌인 스코트랜드 여왕 메리의 아들이 제임스 1세로 즉위했다. 즉위 전 제임스 1세는 이미 스코트랜드의 왕이었다. 두 왕국은 각자의 의회와 법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제임스 1세는 많은 문제에 부딪혔다. 1605년에 로마 카톨릭교도들은 제임스 1세의 암살음모를 꾸몄고, 청교도는 아직 형식적인 예배식을 갖고 있는 영국 국교회의 개혁을 요구했다. 의회 내의 청교도들은 종교개혁과 의회의 권한 증대를 계속 요구했으나, 제임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내세워 이를 거부했다.
1625년 제임스 1세의 아들이 찰스 1세로 즉위한 뒤 왕과 의회 간에는 대립이 격화되었다. 1628년에 의회는 권리청원으로 의회의 통제권을 확대하려고 했다. 그러자 찰스 1세는 1629년부터 1640년까지 의회 없이 통치하며 세금을 올렸다. 종교정책에서 찰스 1세는 엄격한 국교주의를 표방한 켄터베리 대주교 로드의 정책을 지지해서 공식 기도서를 강요했다. 이에 따라 종교의식에서 공식 기도서를 사용하지 않는 성직자들을 처벌했다. 이런 정책으로 인하여 청교도들은 북아메리카로 떠났다.
한편, 1637년에 찰스 1세가 스코트랜드 장로교에까지 기도서 사용을 확대 적용하자 스코트랜드인들은 국민맹약을 맺어 자신의 종교를 지켰다. 그러자 찰스 1세는 스코트랜드에 군대를 파견하기 위한 전비를 마려하기 위해 의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의회가 세금 인준을 거부하자 곧 의회를 해산했다. 스코트랜드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에 찰스 1세는 의회를 다시 소집했다. 의회는 찰스 1세에게 반대하며 스트래퍼드 백작과 로드 주교를 처형하고 성실청을 폐지하였으며, 의회의 동의 없이는 세금을 걷지 못하도록 했다. 찰스 1세는 이에 격분해 의회의 결정사항을 거부하고 무력으로 사태를 해결하려고 했다. 결국 1642년에 내란이 일어났다. 의회를 지지하는 의회파와 국왕을 지지하는 왕당파 간의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의회는 찰스 1세가 합리적으로 통치하고 부패한 측근들의 말을 듣지 않기를 원했다.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 신형군(new model army)의 결정적인 승리로 찰스 1세는 패하여 1649년에 처형당했다.
③ 공화국
찰스 1세가 처형된 후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군대의 지지를 받은 크롬웰이 실력자가 되었는데, 그는 수평파라는 민주주의적 집단을 탄압했고, 군대를 이용해 장기의회를 해산했다. 1653년에 호국경(護國卿, lord protector; 왕권이 미약할 때 왕을 섭정하던 귀족) 정부라는 군사독재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공화국은 해상정책에서는 성공했다. 1651년에 잉글랜드 선박으로만 물품을 수입하게 하는 항해법을 제정했다. 이 때문에 네덜란드와 대립했다. 또한, 아메리카의 에스파냐 식민지와의 교역권을 두고 1655년부터 1659년까지 에스파냐와 싸웠으나, 군사통치와 무거운 세금에 대하여 국민들의 불만이 커져갔다. 1658년에 크롬웰이 죽자 멍크 장군은 군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전격해 의회를 소집했다. 1660년에 의회는 왕정을 복고시키고, 찰스 1세의 아들을 찰스 2세로 즉위시켰다.
④ 왕정복고
찰스 2세는 사회의 분위기를 완화시켰는데, 극장이 다시 문을 열었고 커피하우스가 처음으로 생겼다. 런던은 더욱 번잡한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영국 국교회 기도서의 사용을 강요하는 통일법이 통과되었고, 클라렌든법으로 비국교도의 설교가 금지되었다. 로마 카톨릭에 대한 적대감이 지속되어 1637년에 의회는 국교도에게만 관직을 개방한다는 심사법을 통과시켰다.
1685년에 찰스 2세가 죽고 아들 제임스 2세가 즉위했다. 제임스 2세는 카톨릭교도로서 로마 카톨릭의 청교도에 대한 차별을 폐지하다는 관용선언을 해서 청교도의 지지를 얻으려고 했다. 의회는 로마 카톨릭으로 복귀할 것을 두려워하며, 심교도인 제임스 2세의 두 딸이 왕위를 계승하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1688년에 제임스 2세가 아들을 낳자 의회지도자들은 제임스 2세의 큰 딸 메리의 남편인 네덜란드의 오라네공 빌렘에게 영국을 공격하도록 부탁했다. 빌렘은 도시에 상륙해 군중의 환영을 받으며 런던으로 행진했으며,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도망갔다.
⑤ 명예혁명
1688년의 사건은 피 한방을 흘리지 않고 통치자를 교체했기 때문에 명예혁명이라고 한다. 의회는 빌렘(윌리엄 3세)과 메리를 공동 왕으로 추대했고, 왕권을 제한하는 권리장전을 통과시켰다. 권리장전은 로마 카톨릭교도가 왕위를 계승할 수 없도록 했고, 의회가 자주 소집되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또한, 의회는 로마 카톨릭교도를 제외한 비국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관용법을 통과시켰다. 1701년에는 왕위 계승자가 프로테스탄트여야 한다는 왕위계승법도 통과시켰다.
1702년에 위리엄 3세가 죽고 메리의 여동생 앤이 계승했다. 앤 여왕의 치세에 휘그당과 토리당이 성장했다. 1707년에는 연합법으로 스코트랜드와 잉글랜드가 그레이트브리튼 통일왕국이 되었다. 스코트랜드는 대표를 의회에 파견하기는 했으나, 법과 교회는 그대로 유지했다.
(4) 산업혁명과 해외팽창
① 하노버 왕가
1714년에 앤 여왕이 죽자 제임스 1세의 외손자인 하노버 선제후가 조지 1세로 즉위하여 하노버왕가가 시작되었다. 독일에서 자란 조지 1세는 영어를 잘 할 줄 몰라서 윌폴이 내각과 의회를 열었다. 하노버왕가시대에는 대내적으로 스튜어트왕가의 반란이 두 차례 있었고(자코바이트의 난), 대외적으로는 1739년에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으로 에스파냐와 프랑스가 전쟁을 치렀으며, 1756년에는 프랑스와 식민지 무역에 관한 갈등 때문에 7년 전쟁을 치렀다. 7년 전쟁이 끝난 뒤 1763년에 맺은 파리조약으로 영국은 식민지 무역에 대한 우위권을 인정받았다. 18세기 중반까지 영국의 해외무역은 계속 확대되었다. 영국은 식민지에서 들여오는 생산물을 가공해 비싸게 팔았다.
영국은 북아메리카에 캐나다를 포함한 13개 식민지를 갖게 되었다. 1765년에 의회는 인지법(印紙法; 인지세의 부과·징수를 위해 제정한 법으로, 인지세법이라고도 함)을 통과시켰고, 식민지 주민은 여기에 반발했다. 결국 의회가 인지법을 철회하기는 했으나, 계속 세금을 요구했고 식민지 주민은 반란을 일으켰다. 1775년에 미국혁명이 시작되었고 1776년에 식민주 주민은 독립선언을 했으며, 1783년에 독립을 인정받았다. 1798년에는 아일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곧 진압되었다. 1801년의 연합법으로 아일랜드의 의회가 폐지되고, 그레이트 브리튼과 아일랜드 연합왕국이 성립되었다.
한편,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을 때 처음에 영국인은 혁명을 자유의 승리로 간주해 환영했다. 그러나 혁명이 과격해지자 1793년에 프랑스와 전쟁에 돌입해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한 1815년이 되어서야 전쟁을 끝냈다. 영국은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유럽에서 정치적 우위를 차지했다.
② 농업혁명
인구 증가와 도시 성장으로 식량 수요가 증가해 농업이 수지가 맞게 되었다. 지주들은 생산성 향상을 위해 삼포제 대신 4윤작을 했다. 4윤작에서는 2개의 농경지에는 곡물을 심고 나머지 2개에는 사료로 사용되는 순무와 클로버를 심었다. 조파기(씨뿌리는 기계)가 발명되었고, 가축의 품종도 개량되었다. 19세기 초까지 공유지를 분할하는 등 인클로저운동이 일어났다.
③ 산업혁명
18세기 말에는 산업혁명이 일어나 경제. 기술상으로 거대한 변화를 겪었다. 1830년까지 영국은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변모하였다. 산업혁명은 석탄으로 동력을 공급받는 기계에서 일어났으므로 석탄산지를 중심으로 공업이 발전했다. 산업발전은 수송의 개량을 가져왔고, 농기구의 개량은 생산량을 증대시켜 인구증가를 가져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빈민의 주택문제와 노동조건을 악화시켰고, 실업이 증가하는 문제를 낳았다.
영국은 18세기 초부터 엄청난 기술의 발전이 있었다. 1709년부터 1750년 사이에 다비가 목탄을 사용하지 않는 코크스 제련법을 발명했다. 그 영향으로 제철업이 석탄산지를 중심으로 급속도로 발전했다. 18세기 초에는 뉴커먼이 광산에서 물을 퍼 올리기 위해 증기기관을 발명했고, 와트가 이를 개량해 동력으로 사용했다.
기계의 발명은 제철의 발달을 가져왔다. 기계는 면화공업에서 대규모로 쓰였다. 기계와 증기동력을 사용하면서부터 공장이 세워지고, 집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면화공장, 제철소, 도자기 제조소 등에서 일하게 되었다. 여성, 아동까지 포함한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낮은 임금을 받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장시간 노동을 했다. 또한 주택, 위생, 급수 등 모든 것이 부족했다.
(5) 영국의 개혁
① 차티스트 운동과 선거법 개정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영국의 부와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 그러나 급속한 변화로 사회문제가 많이 생겼다. 19세기 초에는 기계의 사용으로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자 러다이트(Luddite)라는 집단은 기계를 파괴했다(러라이트 운동).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몇몇 노동자들은 조합을 결성했다. 그러나 조합결성은 1824년까지 조합법으로 금지되었다. 한편, 농촌에서는 가내공업의 쇠퇴로 생활이 어려워졌다.
1815년 경제불황으로 더욱 급속히 사회변화가 일어났다. 1819년에 맨체스터의 세인트피터스 광장에서 노동자들이 개혁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으나, 무자비하게 진압당했다(피터루 학살). 그러나 개혁은 곧 이루어졌다. 1829년에 의회는 가톨릭에 대한 제한을 폐지하는 가톨릭 해방법을 통과시켰다. 1832년에는 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중간계급 대부분이 투표권을 획득하게 되었고, 주민이 없는 부패 선거구도 개정되었다.
1832년의 선거법 개정에서도 투표권을 얻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선거법 개정을 요구했다. 이들은 보통선거권 보장, 의원에 대한 봉급 지급, 의원의 재산자격 기준 폐지, 인구비례에 의한 선거구 결정, 그리고 해마다 선거를 실시할 것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작성했다. 이들을 차티스트(Chartist)라고 한다. 차티스트는 1848년에 대규모 시위를 벌였으나 결국 실패했다. 그러나 매년 선거실시를 제외한 모든 요구가 그 뒤에 받아들여졌다. 1867년에는 제2차 선거법 개정으로 도시 노동자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었고, 1884년의 제3차 선거법 개정으로 농업 노동자가 투표권을 얻었다.
② 노동조건의 향상
새로운 공업도시의 발전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보건, 주택, 위생, 지방행정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도시민의 생활조건은 모든 면에서 열악했다. 1833년부터 1853년에 걸쳐 개정된 공장법은 여성과 아동의 노동시간을 줄이고, 노동조건을 개선하며, 공장감독관을 두게 했다. 1842년 광산법은 여성과 소녀, 10세 이하 소년의 갱내 노동을 금지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영국인의 생활조건이 향상되었다. 임금이 인상되고 다양한 공장법으로 노동시간이 단축되었다. 자치 의회는 공공 도서관, 목욕탕, 상수도의 건설 등 복지정책에 힘썼다.
한편, 19세기에 영국은 경제적으로는 자유방임주의를 신봉했다. 1846년에 곡물법, 1849년에 항해법을 폐지했다. 노동조합에 대한 억압은 19세기 중반까지 계속되었으나 1851년에 숙련공들이 금속 기술자 협회를 만들어 성공을 거두자, 다른 숙련공들도 유사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몇몇 조합이 1868년에 노동조합 총회를 결성했고, 1871년의 노동조합법은 노조기금을 보호해 주었다. 1875년의 고용주와 노동자법은 파업기간 중에 작업방해(picketing)을 인정했다.
③ 정치상의 변화
1830년부터 1841년 사이에 단 한 차례를 제외하고는 휘그당이 집권했다. 1835년에 로버트 필은 토리당이 전통을 존중하면서 개혁에 동참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토리당의 이름을 보수당으로 바꾸었다. 이후 보수당의 디즈레일리는 ‘토리 민주주의’를 제창해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돕는 사회개혁을 주장했다.
반면, 휘그당은 글래드스턴의 지도 아래 자유당을 결성했다. 자유당은 중산층과 비국교도를 대변했다. 20세기 초에는 노동조합과 페이비언이라고 하는 사회주의 지식인들이 노동당을 결성했다. 노동당은 1893년에 최초로 의회에 진출했다. 1845년에 기근으로 아일랜드의 사정이 악화되자 그랠드스턴은 아일랜드의 행정을 개혁했다. 그래서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가진 특권을 폐지하고 지주가 농민을 쫓아내지 못하게 했다. 또한, 아일랜드에 자치를 부여하려고 했으나 1886년과 1893년에 아일랜드 자치법이 의회에서 거부되어 실패했다.
④ 식민지 확대
영국은 1867년에 북아메리카법으로 캐나다를 자치령으로 만들고, 1900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1907년에는 뉴질랜드를 자치령으로 만들었다. 인도에서는 1857년에 세포이 항쟁이 일어났다. 영국은 이 항쟁을 진압한 후에 동인도회사를 통한 인도 지배를 끝내고 영국 왕이 직접 통치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남아프리카에서는 두 차례에 걸친 보어 전쟁을 치른 뒤 1910년엔 남아프리카 4개 지역을 통합해 남아프리카 연방을 세웠다.
⑤ 산업의 발달
19세기에 들어와 산업이 급속도로 확대되면서 영국은 세계 산업을 주도하면서, 다양한 기술발명으로 주도적 지위를 유지했다. 베서머가 발명한 저렴한 제련법 덕택에 철 대신 강철을 널리 사용했다. 1844년에는 전신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1866년에는 대서양에 전신 케이블을 설치했다. 이때는 수송과 더불어 통신분야에서도 발전이 두드러졌다. 스티븐슨이 실용화한 기관차가 1830년에 최초로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를 달렸다. 증기기선이 등장했고, 1861년에는 말이 끄는 전차가 최초로 런던에 등장했다. 2년 후에는 지하철을 건설했고, 1883년에 최초로 전기전차가 등장했다. 1890년에 세계 최초로 전동 지하철이 생겼고, 1905년에는 런던에 처음으로 버스와 택시가 등장했다. 1879년에는 처음으로 전화회사가 설립되었다.
(6) 20세기의 영국
① 제1차 세계대전
1906년과 1910년 1월에 자유당이 집권했으나,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당이 상원을 장악하고 있었다. 자유당은 2년 동안 세 번 하원을 통과한 법률은 상원이 거부할 수 없도록 하여 상원의 거부권을 제한하려고 했다. 상원이 여기에 반대했으나, 1910년 12월 선거에서 자유당이 다시 승리하자 상원도 이 법안을 통과시켰고, 자유당은 사회개혁을 계속 추진했다.
19세기 말에 독일의 등장으로 영국은 ‘영광스런 고립’이라는 전통적인 외교정책을 포기했다. 1904년에 영국은 프랑스와 영-프 협상을 맺었는데, 여기에 러시아가 가담해 1907년에 3국 협상이 이루어졌다.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1918년에 전쟁이 끝나고 체결된 베르사유조약으로 국제연맹이 창설되었고, 영국은 독일이 갖고 있던 아프리카 식민지를 차지했다. 그러나 전쟁은 영국에 심각한 경제문제를 가져왔고, 세계 제국으로서의 영국의 지위를 흔들어 놓았다.
한편, 이때 ‘아일랜드 문제’를 겪게 되었다. 1910년부터 자유당 정부는 아일랜드 자치를 요구하는 아일랜드 국민당의 지원을 받았다. 아일랜드 자치법은 1914년에 통과되었다. 그러나 아일랜드 얼스터지방의 몇몇 프로테스탄트가 자치를 거부해 내전이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던 중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자치법은 실행되지 못했다.
1916년에 신페인당이 더블란에서 부활절 폭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1918년 선거에서 승리한 신페인당은 자신들의 의회를 세우고 법정, 군대를 만들었다. 영국은 경찰을 투입했고 16개월 동안 잔혹한 전투가 벌어졌다. 조지 5세는 화해를 요청했고, 로이드 조지 총리는 아일랜드 남부를 아일랜드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자치에 반대한 얼스터의 6개주는 영국에 남도록 했다. 그러나 신페인당은 이를 거부하고 1923년까지 내전을 벌였다.
② 양차 대전 사이
1924년 1월 선거에서 사회주의 집단과 노동조합을 대표하는 새로운 정당인 노동당이 맥도널드의 주도로 권력을 잡았으나, 11월까지만 내각을 이끌었다. 1929년 선거에서 노동당은 처음으로 다수당이 되었고, 맥도널드는 다시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몇 달 후에 세계경제공황이 시작되어 1931년에 맥도널드는 위기에 대처하려고 연립내각을 구성했다. 내각은 세금을 인상하고, 자유무역을 포기했으며 예산을 삭감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직후 영국의 산업은 한동안 부흥했다. 그러나 1920년에는 거의 200만명이 실직을 하였고, 동력이 석유로 바뀌면서 석탄산업이 쇠퇴했다. 1926년에는 광부들이 임금삭감에 대항해 총파업을 했다. 1920년대 말에 세계경제 상황이 악화되자 1932년에는 실업자가 300만명으로 늘었다. 경기가 점차 호전되면서 런던과 남부를 중심으로 경제발전이 이루어졌다. 이 지역에서는 항공기, 자동차, 전기용품이 새로운 산업으로 등장했다.
③ 제2차 세계대전
1939년 3월에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고 9월에는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1940년 5월 10일에 처칠이 총리가 되었으며, 같은 날 독일은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를 공격했다. 6월에는 프랑스까지 독일에 점령당했다. 수백 대의 독일 비행기가 밤마다 영국을 공습했으며, 독일 잠수함이 영국으로 식량과 보급품을 운송하는 선박을 공격했다. 그러자 영국은 음식, 의복, 석탄, 기름의 엄격한 배급을 실시하면서 끝까지 버텼고, 히틀러는 영국 침공계획을 포기했다. 전쟁은 1945년에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전쟁의 피해는 엄청났다. 영국에서는 약 36만명이 죽었고, 런던을 비롯한 많은 도시가 파괴되었으며, 경제도 파탄에 이르렀다.
④ 전후 시기
전후 대영제국은 차례로 해체되어 영국연방이 되었다. 1931년에 영국은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연방의 독립을 승인했고, 이들은 최초로 영국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민족의 독립 요구가 증가했다. 전쟁 직후 인도, 파키스탄, 실론(현재, 스리랑카) 등이 영국연방의 독립국이 되었다. 버마(현재, 미얀마)와 아일랜드 독립공화국을 선포하고 영국연방에서 탈퇴했다. 남아프리카 연방은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인종격리정책을 채택해서 1961년부터 1994년까지 영국연방이 되지 못했다가, 이 정책을 폐지한 후 영국연방에 다시 소속되었다. 1950년대 초부터는 더 많은 영국의 식민지가 독립국가가 되었다.
전후 서유럽 국가들은 정치․경제적인 통합을 위한 다양한 조직을 결성했다. 처음에 영국은 이런 조직에 가입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1950년대에 영국은 유럽공동체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 기구가 성공을 거둔 후에야 다른 6개국와 함께 유럽자유무역협회를 결성했다. 영국은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에 가입했고, 우리나라의 6.25전쟁에도 참전했다. 1956년 7월에 이집트가 영국과 프랑스가 관리하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고, 10월에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운하는 되찾으려고 이집트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 시도는 미국, 소련, 국제연합(UN)의 압력으로 실패했다.
1945년 선거에서 애틀리가 이끄는 노동당이 사회주의적인 개혁을 내세워 압승을 거두었다. 이후 6년 동안 노동당 내각은 사회보장제도를 확대하고, 석탄, 철강, 철도 등 핵심산업을 국영화했다. 그러나 노동당 내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제상황은 거의 호전되지 않았다.
1951년에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 내각이 집권해 노동당이 시행했던 변화의 대부분을 수용했다. 1955년까지 배급과 전시 통제가 해제되었다. 산업이 번창했고, 일자리가 많아졌으며 임금도 나아졌다. 영국은 경제를 향상시키려고 유럽경제공동체에 가입을 신청했으나 1963년 1월에 신청이 거부되었다. 이 때문에 1964년 선거에서 해럴드 윌슨이 이끄는 노동당이 다시 집권했다. 윌슨은 여러 경제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1966년에 윌슨 내각은 세금을 인상하고 임금과 물가의 최고 한도를 정하는 긴축정책을 폈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는 북아일랜드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해묵은 갈등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했다. 1969년 이후 영국은 북아일랜드를 직접 통치하면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스가 권력을 나누어 갖는 안정된 정부를 수립하려고 노력했다.
스코트랜드와 웨일스의 주민들은 ①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는 집단, ② 자신들만의 입법기구를 요구하는 집단, ③ 현재 상태대로 영국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집단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1979년에 영국정부는 두 지역에 자신들만의 입법기구 설립을 묻는 투표를 실시했는데, 유권자들은 이를 부결시켰다.
⑤ 최근 발전
1979년 선거로 보수당이 다시 집권했으며, 대처가 첫 여성총리가 되었다. 그녀는 정부의 경제 간섭을 줄이는 데 힘썼으며, 1982년에는 아르헨티나와 포클랜드 전쟁을 과감하게 수행해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1990년에는 대처의 뒤를 이어 메이저가 총리가 되었다. 1993년에 영국과 다른 유럽공동체 국가들은 정치․경제협력을 증진시키려고 유럽연합을 결성했다. 영국은 1991년 걸프전쟁에서 쿠웨이트를 해방시킨 지상군에 참여했다. 1994년에는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유러터널이 완공되었다. 1997년에는 18년간 보수당 통치를 끝내고 노동당이 집권해 블레어가 총리가 되었다.
<영국 왕조 계보>
2. 관광 지도
3. 시내 풍경
4. 국회의사당 & 빅벤
5.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국회의사당의 서쪽, 파알라멘트 광장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고딕건축양식의 중세교회로, 영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곳은 중세부터 수도원, 교회의 기능을 수행해 왔으며, 왕가의 대관식과 결혼식 및 장례식도 거행되어 왔으며, 공동묘지로도 활용되었다. 부근에는 로마 가톨릭교회 소속의 ‘웨스트민스터 교회’(대성당)가 있으나, 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과는 전혀 별개이다.
영국 대부분의 왕이 대관식을 올렸으며, 왕실의 장례식과 결혼식이 열리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영국의 심장과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으며, 영국인들에게 있어 가장 최고의 수도원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원래 약 6세기경에는 이 자리에 수도원이 있었는데, 앵글로색슨 왕조의 에드워드 왕이 이 수도원을 노르만양식의 교회로 개축하였는데, 이는 13세기까지 존재했다고 한다. 에드워드 왕은 교회의 제단 뒤에 묻혔는데, 그는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묻힌 최초의 왕이 되었다. 이후 헨리 3세가 이 자리에 다시 현재 모습의 사원을 짓기 시작한 이래 약 250여년에 걸쳐 16세기(1503년)에 완성되었다. 초기에는 영국의 건축양식으로 건축되었으나, 후에는 점차 프랑스의 양식이 가미되었다. 어떻든, 이 사원은 건축학적 관점에서 볼 때 영국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웨스터민스터 사원 사진 중에서 가장 흔이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북쪽 입구의 모습인데, 실제 이곳을 통해 사원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저절로 신에 대한 경외심이 발동하여 고개가 숙여질 정도라고 한다.
이곳에서의 최초 대관식은 1066년 크리스마스 때 열렸던 정복왕 윌리암의 대관식이었다. 영국 왕 중에서 에드워드 5세와 에드워드 8세를 제외한 모두 42명의 영국 왕과 여왕들의 웅장하고 화려한 대관식이 펼쳐지는 장소로 유명하다. 그리고 수많은 왕족의 장례식과 결혼식이 이곳에서 펼쳐져 왔는데, 1997년 찰스 왕자의 부인이였던 다이애나의 장례식도 이곳에서 행해졌다. 그리고 최근인 2011년 4월 29일 이곳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손자이자, 찰스와 다이애나의 장남인 '윌리엄' 왕자와 평민 출신 '케이트'의 결혼식이 열리기도 하였다(관련 사진 등재).
한편, 이곳에 에드워드 왕이 묻힌 이래 역대 영국의 왕과 여왕, 왕족, 정치가, 작가, 음악가, 기사, 배우 등 3,300 여명이 넘는 이들이 이곳에 잠들어 있는데, 대표적으로 헨리 3세, 헨리 7세, 엘리자베스 1세, 메리 여왕, 처칠, 뉴턴, 다윈, 헨델 등의 묘를 들 수 있다.
6. 버킹엄 궁전 & 근위병 교대식
영국 왕의 정전인 ‘버킹엄 궁전’의 역사는 1703년 버킹엄 공작(존 셰필드)이 뽕나무 밭을 구입하여 ‘버킹엄 하우스’(Buckingham House)를 지으면서 시작된다. 처음엔 보잘 것 없는 벽돌로 지은 저택에 불과하였으나 1761년 조지 3세가 자신의 왕비 샤를로트를 위해 이 저택을 구입한 이후 왕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어 왕위에 오른 조지 4세는 건축가 존 나슈의 건의에 따라 벽돌집이었던 버킹엄 하우스를 바스산 석재로 장식하여 외관을 바꾸고, 정문을 설치하면서 네오클래식 양식의 궁전으로 개조되었는데, 이때 궁의 서쪽 부분도 마련되었다.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이 등극하자 바로 이 궁전에 거처를 정했고, 이때부터 존 나슈가 설계한 대리석 궁륭인 마블아치(marble arch) 위에 궁정 깃발이 펄럭이게 되었다. 이후 공사가 계속되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동쪽 건물이 완공되면서 남쪽 건물 및 북쪽 건물과 이어져 사각형 안마당이 형성되고, 1913년 더 몰 가와 직선으로 연결된 건물과 발코니가 들어섰다. 이 발코니가 국경일이 되면 왕실가족이 나와 국민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곳이다.
궁전 안에는 미술품 컬렉션을 전시한 퀸스 갤러리만 공개되고 있다. 궁전 남쪽에 있는 로열 뮤즈에는 왕실의 마차가 전시되어 있으며, 첸버즈가 디자인하고 카프리아니가 그림을 그린 마차(1762)가 유명하다.왕이 궁전에 있을 때에는 궁전 정면에 왕실기가 게양된다. 현재 버킹엄 궁전은 7~9월에 일반인 입장이 가능하다.
빅토리아 여왕 기념탑
7. 트리팔가 광장
나폴레옹이 이끄는 에스파냐-프랑스 연합함대를 트라팔가 근해에서 격파한 넬슨 제독 동상, 네 마리의 사자상 등이 있는 광장
8. 피카델리 광장
(런던의 명동이라고 불리는 소호의 '피카델리 광장')
9. 하이드 파크, 앨버트공(빅토리아 여왕 부군) 동상 & 로얄 앨버트 홀
'로얄 앨버트 홀'은 앨버트공 기념동상의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 앨버트공의 유언에 의해 건축되었다.
10. 타워브릿지
11. 대영 박물관(British Museum; 영국 박물관)
세계적으로 희귀한 고고학 및 민속학 수집품들을 소장한 박물관으로, 런던의 블룸스버리 지역에 있다. 왕립학사원장을 지낸 의학자 한스 슬론경(Sir Hans Sloane)의 6만여 점에 이르는 고미술(古美術)·메달·동전·자연과학 표본류 등 방대한 소장품을 1753년 정부가 매입할 것을 의회에서 의결하고, 로버트 코튼경(Sir Robert Cotton)의 장서와, 옥스퍼드의 백작 로버트 할리(Robert Harley)의 수집품들을 합하여 1759년에 설립, 일반에게 공개하였다.초기에는 17세기 프랑스 고성풍(古城風)의 진귀한 건물로 그레이트 러셀가에 있던 몬터규(Montagu) 후작의 저택에 전시되었다. 그러나 소장품이 증가하자, 1824년부터 로버트 스머크경(Sir Robert Smirke)의 설계로 동쪽에는 장서용, 서쪽에는 이집트 조각 전시용의 갤러리가 먼저 세워지고, 1852년 중앙부의 옛 건물 자리에 신고전양식(新古典樣式)으로 현재의 정면 건물이 완공되었다.1881년 자연사 소장품들은 사우스켄싱턴에 신축한 자연사 박물관으로 옮기고, 박물관 안의 도서관은 몇몇 주요 기관들의 장서를 합하여 영국 도서관으로 독립하였다. 또한 1970년부터 민족학 부문 소장품들은 웨스터민스터의 벌링턴가든스에 있는 인류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주요 전시품에는 1802년 프랑스에서 얻은 이집트의 고고학 자료, 1806년에 수집한 타우네레, 1816년에 수집한 엘긴 대리석 조각, 이밖에 크니도스의 데메테르 여신상, 소크라테스의 소형상(小形像), 페리클레스의 반신상(半身像), 율리우스 카이사르 및 로마 제왕들의 흉상 등이 있다.이외에 아시리아의 날개 달린 황소, 칼데아의 유물, 헨리 8세 궁전의 금붙이 세간, 중앙아시아의 옥수스의 유보(遺寶), 중국의 벽화·도자기 및 불상 등이 있다. 그밖에 성서의 알렉산드리아 사본, 색슨의 연대기, 마그나카르타, 옛날 인쇄·제본의 견본 등은 하나의 문헌으로서도 귀중하다. 한편, 2000년 11월 396.72㎡ 규모의 한국관이 신설되었는데, 구석기 유물부터 청자·백자 등 조선 후기 미술품 25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