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    차 ]

 

1. 피렌체 소개 및  관광지도

2. 미켈란젤로 언덕 & 피렌체 전경 

3. 시내 풍경

4. 산타 크로체 성당

5. 산 로렌초 성당

6. 두오모 성당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7. 베키오 다리 & 아르노 강

8. 단테 생가

9. 베키오 궁전

10. 시뇨리아 광장    

11. 우피치 미술관

12. 피티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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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Firenze) 소개 및 관광지도

 

피렌체(Firenze)는 영어식 표현으로는 '플로렌스'(Florence)라고 하는데, 르네상스 당시의 인구는 약 6만명이었으나, 현재는 약 35만명의 인구를 이루고 있다. 피렌체는 로마로부터 북서쪽 233km 위치의 아르노 강()의 양안(兩岸), 구릉과 선상지 상에 조성된 도시로, 원래 고대 로마의 퇴역 군인들을 위해 조성되었다. 피렌체는 현대화된 여타의 도시와는 달리 지금까지 근대적인 대도시의 색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현재 아르노 강 연변의 교통로 및 아펜니노 산맥을 넘는 교통로의 요지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근교의 아르노강 연변 저지대에는 신흥공업지대가 형성되어 있어 상공업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피렌체가 중세 및 르네상스의 사상과 문화 및 예술을 꽃피우게 된 것은 바로 화가 조토(지오토), 시인이자 사상가 단데, 소설가 보카치오, 정치가이자 사상가 마키아벨리,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 화가 라파엘로,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예술가 미켈란젤로 등과 같은 많은 천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천재들에 의해 창안되고 가다듬어진 사상과 문화와 예술의 아름다움과 그 시대의 정취를  직접 느껴보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방문하고 있다.

 

피렌체의 역사는 BC 10세기 무렵의 취락 빌라노바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도시로서의 발전은 BC 2세기부터 시작되었는데, 특히 로마에서부터 뻗어오는 카시아 가도(街道)의 중심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당시에 계획적으로 건설된 부분은 현재의 시가 중심부와 일치하며, 베키오 다리의 우안(右岸)에 해당한다. 로마 제정(帝政)시대에는 토스카나·움브리아의 중심이 되고, 프랑크 왕국의 지배하에서는 백작령(伯爵領)의 중심이 되었으나, 11세기 후반 마틸데의 시대까지 도시의 발전은 정체상태였다. 마틸데 사망 후 12세기 전반에 코무네(comune; 중세 말기 이후 이탈리아 주민자치공동체로, 이는 크게 도시 코무네와 농촌 코무네로 구분됨)로서 독립하고, 좌안(左)의 보루고 지역을 병합해서 발전하였다.

 

12세기 무렵부터 산업, 특히 모직물공업이 발전하여 많은 직물상인이나 귀금속상인이 각기 조합을 만들어 경제적으로 번영하였는데, 이로써 유럽의 상공업·금융업의 중심이 되었다. 13세기에 이르러 교황당(겔프)과 황제당(기벨린)과의 싸움이 피렌체뿐만 아니라 전() 토스카나 지방, 나아가서는 전 이탈리아를 휩쓸었으며, 이때 피렌체는 피사 등의 인근도시를 지배하여 강대한 공화국이 되었다. 1300년에 비롯된 백당(白黨)과 흑당(黑黨)은 단테를 망명하게 하였으나, 이 무렵의 피렌체는 이미 인구 10만을 헤아렸고, 산업뿐만 아니라 문화면에서도 이탈리아의 중심이 되었다. 특히, 14세기 초 인구 10만의 이 도시는 길드를 중심으로 한 '시뇨리아'(최고행정기관)가 주축이 되어 입법과 행정을 펼쳤다.

 

15세기 초부터 메디치 가()가 시정(市政)에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였는데, 코시모 및 그 손자인 로렌츠는 실질적으로 메디치 가의 강력한 지배체제를 확립하였으며,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으로서 황금시대를 주도하였다. 르네상스는 14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하여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인간성 해방을 위한 문화혁신운동으로서, 도시의 발달과 상업자본의 형성을 배경으로 하여 개성합리성현세적 욕구를 추구하는 반() 중세적 정신운동이며, 문학미술건축자연과학 등 다양한 방면에 걸쳐 유럽 문화 근대화의 사상적 원류가 되었다. 특히, 피렌체는 직물과 금융업이 바탕이 되어 경제적으로 호황을 누렸으며, 인구의 4.5% 정도에 이르는 부유층이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르네상스 운동을 견인하였다.

 

15세기 말부터 메디치 가의 추방과 복귀가 되풀이되었으나, 1532년 메디치 가의 세습체제가 확립되어 피렌체는 토스카나 공국(公國)의 수도가 되었다. 이 무렵부터 질병이 유행하고 인구가 감소되어 이탈리아의 다른 여러 도시와 마찬가지로 도시경제도 쇠퇴하기 시작하여 19세기 초까지 인구는 10만 이하에 머물렀다. 1859년 토스카나 공국은 사르데냐 왕국(뒤의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었는데, 피렌체는 1865년부터 1870년까지는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였다. 2차 세계대전에서는 격심한 연합군의 공습을 받았으며, 19448월에는 영국·독일 양군의 치열한 공방전의 무대로 참화를 입었다.

 

피렌체는 상공업이 성하며 식품·의료·가구 등의 일용품공업 외에 자동차부품·자전거·냉장고·농업기계 등의 제조공업과 전통적으로 이름 높은 가죽제품공업이 이루어진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지로서 1315세기의 예술작품이 많이 남아 있는데, 시정(市政)의 중심이었던 베키오 궁전(시놀리아 궁전)을 비롯하여, 미술관과 도서관고문서관(古文書館)이 들어 있는 우피치 궁전, 독특한 고딕양식의 두오모 성당(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조토의 벽화 등으로 유명한 산타 크로체 성당, 도나텔로 등의 작품으로 알려진 산 로렌초 성당 등이 있는 시가지 중심부는 거리 전체가 박물관과도 같다. 한때 피티 가()의 저택이었으나, 후에 메디치 가의 저택이 된 피티 궁전 현재 미술관이고, 그 밖에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포함한 작품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아카데미아 미술관, 안젤리코의 벽화로 유명한 산 마르코 미술관(산 마르코 수도원 내에 있음) 등이 있다. 또 이탈리아에서 손꼽히는 종합대학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기관·연구기관이 모여 있다. 1966년 가을에 아르노강이 범람, 우피치 궁전 등 시가의 중심부가 침수되어 귀중한 문화재가 큰 손실을 입었다.

 

피렌체의 역사지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데, 이곳은 사방 1km 밖에 안 되는 좁은 구역이다. 하지만 지역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아름다운 문화유산으로 가득 차 있다. 곳곳에서 걸작품들을 보면 ‘꽃’의 도시(피렌체는 꽃이라는 의미임)라는 이름이 진정 무색하지 않다. 마치 작품 하나하나가 꽃이 되어 거리에 벽면에 피어서 도시를 장식하고 있는 것 같다.

 

토스카나 지역의 중심지로서 피렌체는 메디치가 지배하의 르네상스 예술의 중심지로서 조토(지오토, Giotto ; 1266~1337 : 3차원의 그림을 그린 최초의 화가),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등 유명 예술가의 작품들이 피티 궁전, 우피치 미술관(우피치 궁전 내), 아카데미아 미술관, 산타 크로체 성당, 산 마르코 미술관 등에 남아 있다. 특히, 14~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조토,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 유명 예술가들의 걸작이 도시 곳곳에 남아 있다. 역사지구 전체가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가득 차 있는데, 마치 르네상스 시대 거장들이 일부러 합심하여 도시 하나를 꾸민 것 같다. 이들의 작품 하나를 얻기도 쉽지 않을 터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피렌체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예술과 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은 메디치 가문의 공헌이 크다. 금융업을 통해 축적한 부를 기반으로 피렌체에서 정치적 영향력까지 행사했던 메디치 가문은 문화와 예술의 후원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메디치 가문의 후원 덕분에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단테, 보티첼리 등 쟁쟁한 거장들이 피렌체에서 활동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던 것이다.

 

특히, 피렌체의 중심에 있는 두오모 성당(원명 :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은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작품이다. 175년 동안 공을 들여 만든 건물답게 장엄하고 화려해서 피렌체의 상징물로 자리 잡았다. 오랫동안 피렌체의 정치중심지였던 시뇨리아 광장에서는 코시모 1세 동상과 종교개혁자였던 사보나롤라 처형지를 볼 수 있다. 광장에 면해 있는 베키오 궁전은 14세기 고딕건물로 깜비오가 설계한 것이다. 현재는 시청으로 쓰이고 있다. 예술과 문화의 후원자였던 메디치 가(家)의 저택이었던 베키오 궁전은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로 1층 예배당에 있는 고촐리의 프레스코화(소석회()에 모래를 섞은 모르타르를 벽면에 바르고 수분이 있는 동안 채색하여 완성하는 그림)가 유명하다. 산타 크로체 성당에는 조토의 프레스코화, 미켈란젤로, 갈릴레오 갈릴레이, 마키아벨리 등 이탈리아 유명인사들의 무덤이 있다.

 

이외에도 두오모 성당의 조토 종탑을 포함한 시가지를 한눈에 조망하기에 적합한 미켈란젤로 언덕, 도나텔로의 작품이라는 산 로렌초 성당, 안젤리코 벽화로 유명한 산 마르크 미술관, 단테 생가, 베키오 다리 등도 놓치지 말아야 할 볼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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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미켈란젤로 언덕 & 피렌체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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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내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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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의 창살 굵기는 부를 축적한 상업계층의 부유한 삶을 간접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상업자본가(특히 메디치 家)들은 중세의 교권과 왕권의 불합리한 권위에 도전하면서, 인간중심주의를 지향하고 문학과 예술에 재능을 가진 천재들의 창작활동에 대하여 많은 관심과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피렌체가 14세기부터 '르네상스 ' 운동을 견인하는 데 대표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서양의 역사와 문화에 있어 대전환을 가져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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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의 발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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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 조토(지오토, Giotto) , 오른쪽 : 브루넬레스키(Brunelleschi)

 

조토(지오토; Giotto di Bondone, 1266~1337)

피렌체파 회화의 창시자로서 그 명성은 동시대의 시인 단테의신곡,연옥편 제11에서 치마부에와 대비, 찬양되고, 페트라르카나 보카치오 등의 저작에서도 나온다. 그러나 초기의 미술활동에 관한 확실한 문헌은 없고, 소년시절 양()을 사생하고 있을 때 치마부에에게 발견되어 그의 문하에 들어갔다는 일화가 있다. 초기의 주요작 아시시의 산프란체스코 성당 상원(上院)의 벽화 성 프란체스코전()28()에 관해서는, 의문시하는 학자도 있어 논의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새에 설교하는 성 프란체스코등 몇 점의 그림은 조토의 작품으로 간주된다.

 

 

브루넬레스키(Brunelleschi, 1377~1446) 

이탈리아의 건축가로서 르네상스 건축양식의 창시자 중 하나이다.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커다란 돔 건축으로 유명하다. 또한, 공간의 깊이를 표현하는 미술 원근법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생애와 대표적인 건축물 및 역사적 공헌에 관하여 자세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브루넬레스키는 1377년 피렌체에서 출생하였다. 15세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건축양식 창시자의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공증인이었고 어머니는 귀족 출신이었다. 차남인 그는 아버지의 직업을 계승하는 대신 금속 공예의 기술을 익혀 조각가가 되려고 하였다. 1401년 피렌체세례당 출입문의 양각(陽刻) 콩쿠르에 응모하여 L.로렌초 기베르티의 작품과 끝까지 경쟁한 결과, 결국 기베르티의 작품이 최종안이 선정되었다. 그러나 현존하는 당시 시작품(試作品) 《이삭의 희생》(피렌체 바르젤로미술관 소장)은 하나하나의 조각상이 매스로서 정확하게 파악되어 있고, 또 그것들이 극적으로 힘차게 구성되어 있어서 산타마리아 노벨라성당의 목각상 《그리스도의 책형(磔刑)》(1409?)과 더불어 브루넬리스키는 조각가로서의 뛰어난 자질을 보여주고 있었다.

 

콩쿠르에 낙선한 이후 브루넬레스키는 로마로 건너가 고대 로마건축을 연구하면서 건축가로서의 활동에 전념하였다. 그가 다시 유명해진 것은 피렌체로 돌아와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커다란 돔(1436 낙성식) 제작을 의뢰받고, 이를 성공적으로 건축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하였다. 고대 로마의 판테온의 가구(架構) 기술을 도입하여 전통을 중요시하면서도 새로운 구성미를 만들어내었으며 피렌체에 새로운 미술을 기운을 북돋는 데 역할을 하였다. 또한 그는 피렌체의 첫 사회시설인 오스페달레 델리 인노첸티(고아양육원: 1421∼1444)에서는 9단의 계단 위에 연속된 아케이드의 전망 효과를 노리고 있으며, 명쾌하고 새로운 율동감을 주고 있다. 또한 산로렌초성당(1418 이후)과 산토 스피리토성당(1436 이후)에서는 저마다 질서 있고 지적(知的)인 공간구성이 특색이다. 후자의 본당에서는 집중식 형태에 대한 관심이 엿보이는데 이는 산로렌초성당의 성기실(聖器室: 1428), 파치가(家)의 예배당(1429 기공),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리성당(1434 기공) 등에서 실현되고 있다. 특히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리성당은 순전히 집중식 형태를 노려서 건립된 것으로 그의 건축양식에 대한 한 가지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었는데, 불행히도 1437년에 공사가 중지되어 지금은 1층 벽면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의 위대성은 전통에서 계승한 구조방식을 여러 군데에 수시로 활용하면서도 새로운 시대에 적응한 구축(構築)의 미적 법칙을 거기에서 이끌어내고 실현한 점에 있다. 부르넬레스키는 이런한 건축의 업적이외도 회화에서 원근법(perspective)의 발명자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미술의 발전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4. 산타 크로체 (Santa Croce) 성당

 

'산타 크로체 성당'은 프란치스코회의 수도원 교회당으로, 이는 '성스러운 십자가 교회' 라는 명칭이다.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설계에 의해서 1294~1385년 건축된 고딕양식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이는 T자형 평면으로 이루어진 3랑 바실리카 형식으로, 동단에 주제실, 그 양쪽에 10개의 경당이 위치한다. 기본구성과 조형은 시토회의 교회당의 강한 영향을 받으며, 곡선적 모티브와 화려한 장식을 피하고, 가는 각주와 넓은 주간(柱間)이 낳은 유유한 공간이 정감을 갖추었다.

 

예배당은 피렌체 명가의 전용 제실로서 이용되었다. 조토(지오토, Giotto ; 1266~1337 : 3차원의 그림을 그린 최초의 화가)는 인물묘사에 참신한 사실(寫實)을 나타냄으로써 미술사상 특이할 만한 업적을 남겼는데, 그가 원숙기에 그린 프레스코화(소석회()에 모래를 섞은 모르타르를 벽면에 바르고 수분이 있는 동안 채색하여 완성하는 그림)프란치스코전, 2명의 요한전』이 이곳에 전시되어 있. 성당 내에는 그 외에 가디의 프레스코화, 도나텔로의 책형상과 성모 피승천 렐리프 등 고딕 말기에서 초기 르네상스에 걸친 귀중한 유품이 남아있다. 14, 15세기에 수도원이 완성되었는데, 현재 그 일부는 미술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성당의 남측에는 초기 르네상스 건축의 대표적 작품인 파치(Pazzi) 가(家)의 예배당이 서 있다. 1966년 대홍수로 피해를 입었는데, 수복공사 중에 본당 바닥에서 전신이 된 소회당(13세기 전반)의 유적이 출토되었다. 백과 녹의 대리석을 조합한 고딕풍의 파사드(정면)19세기 중엽에 개축되었다.

 

내부 지하에는 미켈란젤로, 갈릴레오 갈릴레이, 마키아벨리 등 피렌체 출신 유명인사의 무덤이 있다. 그러나 피렌체의 대표 시인인 단테는 기념묘만 안치되어 있다. 피렌체의 당파싸움에 휘말려 피렌체에서 영구 추방당한 단테(1265~1321)는 라벤나 영주 폴렌타의 외교사절로 베네치아에 다녀오는 길에 사망한 뒤 토스카나 지방의 라벤나에 묻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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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치 가(家)의 예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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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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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단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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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토의 프레스코화 '프란체스코전'의 일부, 아래 그림도 이에 포함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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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면과 바닥에 유명인사들의 기념비와 묘들이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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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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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가묘(기념묘) : 단테는 피렌체에서 영구 추방되어 그의 실제 묘는 토스카나 지방의 라벤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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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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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주의자이자, 법관이었던 칼로 마르수피아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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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산 로렌초(San Lorenzo)  성당

 

산 로렌초 성당은 1421년 브루넬레스키에 의해 기공되어 1446년 그가 죽은 뒤에는 안토니오 마네티가 이어받아 건축하였다. 이 성당은 브루넬레스키가 모든 디자인을 시도한 최초의 작품이자, 최초의 르네상스식 건축이다. 디자인에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바실리카양식을 채용하여 원주(圓柱)와 반원 아치로 지탱된 신랑벽(身廊壁), 평천정(平天井), 판단티프 돔을 사용하였다. 전체적으로 반원형과 사각형을 대비해가며 짜맞춘 대담한 조화를 이룬 디자인이 특징이다. 고성기실(古聖器室)은 브루넬레스키의 설계로 1421~1434년에 건조되었으나, 신성기실(新聖器室)은 미켈란젤로가 1521~1534년에 건축한 것으로, ‘메디치 가(家) 예배당’으로서 유명하다. 또한, 크로이스터 상층(上層)의 '라울렌치아나 도서관' (1523~1552)도 미켈란젤로의 걸작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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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내에 있는 '라울렌치아나 도서관' (미켈란젤로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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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두오모(Duomo) 성당

 

피렌체 두오모 성당의 원래 명칭은 ‘꽃다운 성모 마리아(Santa Maria del Fiore) 대성당’이란 뜻이다. 1296년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기공한 고딕성당으로, 삼랑식의 장당식(長堂式) 신랑부(身廊部) 동쪽에 다각형의 아프시스 3개가 돌출하고, 그 내부에는 각각 5개의 제실이 있다. 외벽은 화려한 색 대리석으로 복잡한 장식을 하였다. 1334년 조토가 종탑을 기공하였고, 1357년 주임 건축가가 된 프란체스코 타헨티가 평면규모를 확장하여, 조반니 디 라포 기니(Giovannieli Lapo Ghini) 설계의 드럼(1420 완성)이 부가되었다. 8각형인 돔(내경[內徑] 42m)은 1418년의 콩쿠르에서 브루넬레스코의 안을 채용하여 1420~1434년에 건조하였고, 정탑(頂塔)은 1432~6년에 부가하였다. 돔의 기부를 조이는 항장력 링을 사용한 이중 돔이 외부에 노출하여 높이 치솟아, 르네상스와 바로크 돔의 선구로서 유명. 종탑은 조토가 제1층을 완성하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안드레아 피사노, 타렌티 등이 공사를 계속하여 1359년에 거의 완성하였다. 대성당의 서쪽 정면은 1875~87년에 완성하였으나 돔 기부의 갤러리 등에는 미완성된 부분도 있다. 북쪽의 만둘라 문은 14, 15세기의 저명한 조각가들의 작품으로 장식되어 있다. 내부 중앙의 제단부분에는 기베르티 작인 제노비우스(피렌체의 수호신)의 청동상과 베네딕트 다 마이야노 작(作)의 책형상(磔形像)이 있고, 북쪽 수량 제실에는 미켈란젤로 만년의 『피에타』상이 있다. 신랑부 북쪽 벽에 그려진 우첼로의 『존 호크우드 기마상』(1436), 카스타뇨의 『나콜로 다 트렌티노 기마상』(1456)의 프레스코 벽화도 유명. 서쪽 정면 앞에는 산 조반니 세례당이 있고, 또 대성당 동쪽의 부속보물관에는 성구실(聖具室)용으로 만든 도나텔로와 루카 델라 로비아의 2개의 대리석 칸트리아 합창단(모두 1430년대) 등 대성당 관계의 미술품이 수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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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 여행 1230.JPG (종탑은 세 차례에 걸쳐 현재 높이(84미터)의 모습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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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베키오 다리 & 아르노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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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키오 다리' 는 로마시대에 처음 건설되어 수없이 허물어졌다가 다시 세워졌다. 현재 모습은 1345년 건축된 2층 다리로, 현재 모습은 1565년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바자리가 개축한 것이다. <신곡>을 집필한 단테( Dante, 1265~1321)가 첫사랑 베아트리체(Beatrice)를 만나 사랑에 빠진 곳이기도 하다. 당시 베아트리체의 나이는 9살, 그 후 9년 뒤 그녀와 사랑을 시작하였다. 그들의 사랑은 베아트리체가 24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애틋하게 이어졌다.

 

* 베아트리체는 르네상스 시기 4대 시인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이탈리아의 단테(Alighieri Dante)가 9세 때 첫눈에 반해(단테는 "그때부터 사랑이 내 영혼을 압도했네"라고 씀) 1321년 죽을 때까지 자신의 생애 대부분과 시 작품을 바치며 사모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단테가 1307년과 1320년 사이에 집필한 작품인 <신곡(神曲:La divina commedia)>에서 주인공에게 천국을 소개하는 안내자의 이름이기도 하다. 베아트리체는 피렌체 귀족의 딸인 베아트리체 포르티나리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이 여인은 시모네 데 바르디와 결혼했다가 1290년 6월 8일 24세의 나이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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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홀리데이(Henry Holiday)의 1883년 작 '단테 베아트리체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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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티첼리(Botticelli)의 1495년 작 '단테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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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론 레던(Odilon Redon)의 1855년 작 '베아트리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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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가브리엘 로제티(Dante Gabriel Rossetti)의 1853~1854년 작 '베아트리체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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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게이브리엘 로제티(Dante Gabriel Rossetti)의 1864~1870년 작 '축복 받은 베아트리체')

: 오른쪽 위에 단테(Dante)로 보이는 사람이 있고, 가운데 여인은 눈을 감고 있는데, 붉은 비들기가 그녀의 치마 위로 죽음의 꽃 양귀비를 물어다 주는  것은 여인이 죽음에 임박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 새와 같이 붉은 옷을 입은  흐릿한 인물이 왼편 위에 서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단테가 그토록 찾아 헤매도 볼 수 없었던 천상의 사랑일 것이다. 이그림은 연작의 하나인데, 작가의 아내 '엘리자베스 시달'을 모델로 그린 것으로, 그녀의 죽음을 추모하며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작가는 개인적으로 평소 자신을 단테와 동일시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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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게이브리엘 로제티(Dante Gabriel Rossetti)의 1855년 작 '결혼식 연회에서 만난 베아트리체와 단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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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Domenico di Michelino)의 1465년 작 '단테와 세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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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아턴(Leighton)의 1864년 작 '추방당하는 단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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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크루아(Delacroix)의 1822년 작 '단테의 조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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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앙 아돌프 부그로(William Adolphe Bouguereau)의 1850년 작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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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게이브리엘 로제티(Dante Gabriel Rossetti)의 1871년 작 '베아트리체의 죽음의 순간에 단테가 꾼 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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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테(Dante, 1265~1321)의 사랑과 삶

 

단테는 1265년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많이 배출된 도시국가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 환경은 보잘 것이 없었다. 아버지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가문출신이었고, 고리대금업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리고 단테의 어머니는 그가 다섯 살 때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아버지도 재혼한 후 얼마 안 되어 운명했다. 그래서 단테는 그를 과히 좋아하지 않았던 계모의 품에서 자라났다. 이후 단테는 먼 친척 인 도나티의 보호를 받았으며, 도나티는 단테가 열두 살이 되자, 당시의 관습대로 자기 딸 젬마와 약혼시킬 준비를 했다.

 

단테는 아홉 살 때에 처음으로 피렌체 출신의 소녀 베아트리체를 보았다. 이 만남은 <신생>이란 작품에서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는 이 소녀를 보자마자 자기의 마음이 설레고 있음을 알았다. 이러한 인상과 감정은 그가 죽을 때까지도 변치 않고 계속된다. 그는 베아트리체를 ‘가장 어린 천사’ 라고 불렀다. 그의 초기 시는 거의 모두 그녀를 위해 쓰여졌을 뿐만 아니라,  그의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그의 말기 시도 모두 그녀에 대한 감정이 동인이 되었다. 

 

그녀에 관해 쓴 그의 모든 작품에서 그녀는 항상 이상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은 ‘아름다움’이라는 어원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행복과 축복을 주는 여인이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단테는 항상 그녀에게서 이런 아름다움과 행복과 축복을 보았던 것이다. 언젠가 친구들이 그녀를 사랑하면서 얻은 게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한 여자를 찬미하는 행복’을 알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우연히 만난 그들은 단테가 열 여덟 살이 되어서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들은 베키오 다리(산타 드리니타 다리) 바로 옆의 거리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 그녀는 흰옷 차림으로 다른 두 부인과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당시 그녀는 이미 유명한 피렌체 귀족의 두번째 아내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가던 길을 멈추고 단테에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단테는 베아트리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이 빨개진 채로 말을 더듬거리며, 겨우 인사를 받았을 뿐이었다. 

 

그날 밤부터 그의 영혼은 심하게 동요되기 시작했다. 당시 궁색하고 미천한 단테는 멀리서 그녀를 숭배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가 베아트리체에 반했다는 소식은 온 도시에 퍼졌고, 베아트리체도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녀 앞에서 그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쩔쩔 맸지만, 그녀가 없는 곳에서는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눈물을 흘리며, 이런 마음을 시로 옮겨 적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침실은 ‘눈물의 방’ 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그녀는 그의 시로 말미암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던 것이다. <신생>에 의하면,  어느 날 그는 베아트리체가 사는 지방에 가게 되었다. 그때 그녀는 자기가 단테의 수호신이 되겠다고 말하지만, 사람들이 그를 험담했기 때문에, 이후 베아트리체는 그에게 눈길조차 보내지 않는다. 그 후 며칠이 지나서 그녀는 아버지를 잃고 슬픔에 잠긴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도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 스물네 살이었다. 그녀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단테는 이렇게 썼다. “나는 내 영혼의 가장 중요한 기쁨을 잃었습니다. 나는 슬픔으로 가슴에 매어지고, 그 어느 것도 나를 위로해 줄 수 없습니다.” 

 

단테는 심각한 정신적 위기에 빠져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로>나 키케로의 <우정에 관하여>를 읽으며 마음의 상처를 달랬다. 그러나 베아트리체의 연인은 그녀를 잃은 것을 슬퍼하면서 세상을 등진 채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지는 않았다. 반대로 그는 13세기 피렌체의 정치 및 종교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당시의 피렌체가 가장 영화를 누리던 시기였다. 그는 키케로, 플리니우스, 세네카 등의 도덕철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성 크로체 수도원과 성 마리아 수도원 등에서 열린 신학과 철학 연구회에 관여했다. 

 

또한, 1292년에는 베아트리체를 노래한 서정시에 해제를 붙여 <신생>을 쓰기 시작했다.  1295년에 그는 약혼 중이던 마네토 도나티의 딸 젬마 도나티와 결혼했으며, 아들 조반니, 야코보, 피에트로와 딸 안토니아와 베아트리체를 갖게 된다. 또한, 그 해에 단테는 의사 길드조합에 참여했다. 그리고 1300년에 그는 다른 다섯 사람과 함께 피렌체를 통치하는 최고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이런 화려한 정치활동은 그를 비극으로 몰고 간 원인이 되었다. 최고책임자로 있는 동안 그는 교황과 마찰을 빚었다. 단테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했지만, 교황은 교황청이 모든 기독교인과 국가를 통치하는 최고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문제로 피렌체에는 시민의 지지를 받으며 피렌체의 자치를 지키려는 백파와 흑파 사이에 신학적․정치적 갈등이 야기되고 있었다. 

 

단테는 이런 문제를 교황과 해결하기 위해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로마 교황청에 파견되었다. 그런데 그가 로마에 있는 동안 흑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피렌체의 정권을 잡고서 백파의 추방을 결의했다. 1302년에 단테는 피렌체 법정에 출두할 것을 명령받았지만,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영구 추방령이 내려졌고, 귀국하던지 혹은 피렌체 사직에 체포될 경우 화형에 처한다는 선고를 받았다. 이렇게 하여 그의 20여 년에 가까운 유랑생활이 시작되었고, 그는 다시는 자기의 고향이자 베아트리체의 고향 땅을 밟을 수 없게 된다.

 

그에겐 이제 20여 년이란 기나긴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 세월은 그가 부득이 시민과 가장으로서의 의무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기간이었지만, 그런 나날이 없었으면 취하지 못했을 두 가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바로 자유의 참맛과 <신곡>이었다. 그의 인생과 그의 작품 <신곡>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 작품 속에 그의 전 생애가 함축적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신곡>은 서곡을 포함, 지옥편 34곡, 연옥편 33곡, 천국편 33곡 등 모두 100곡으로 이루어진 장대한 작품이다. 이는 인류 역사상 인간의 사랑을 다룬 시 가운데 가장 큰 영광을 누린 작품이다.단체는 지옥 밑바닥에서 적막한 연옥을 거쳐 신성한 영혼들이 있는 곳, 신의 불꽃에 이르는 여정을 담은 이야기를 평생에 걸쳐 시로 옮겼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유배 중에 이 시를 완성하였다. 

 

<신곡>의 줄거리는 35세의 단테가 1300년 부활절을 맞이하여 한 주 동안 여행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테가 숲속에서 헤매는 것으로 이 작품은 시작된다. 그는 숲 속의 짐승들이 상징하는 속세의 유혹에서 빠져 나오려고 애를 쓴다. 그때 <아이네이스>의 작가인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그를 지옥과 연옥으로 안내하면서 천국에 도달하여 그를 천국에 도달하여 그를 구제할 것을 약속한다. 사실 이 베르길리우스는 단테가 자기의 정신적 아버지로 삼고 있던 사람이었으며, 그는 단테에게 세 여인의 부탁을 받고 온 것이라고 말한다. 이 세 여인은 바로 성모 마리아와 성녀 루치아, 그리고 베아트리체였다. 

 

베르길리우스는  단테를 지옥으로 안내한다. 이 두 사람은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해질 무렵까지 스물네 시간 동안 9개의 지옥을 살펴본다. 마지막 지옥에는 육친이나 조국 혹은 주인을 배반한 자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가시나무로 바뀐 자살자는 괴조에게 뜯기며,  마법사는 머리를 뒤틀면서 뒷걸음질치고, 연금술사는 역병에 시달린다. 또한, 악마 대왕 루시퍼는 가장 죄질이 나쁜 3명의 배신자들을 깨물고 있었는데, 그들은 부르투스와 카시우스, 그리고 유다였다. 

 

그런 다음 베르길리우스와 단테는 고행의 지역인 연옥으로 향한다. 그곳에서는 살아 있던 동안 회개가 늦었던 자들이 있었으며, 그들의 죄목은 오만, 질투, 노여움, 게으름, 탐욕, 대식, 색욕 등이었다. 베아트리체는 연옥의 30 곡째가 되어서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그가 속세의 천국에 도착하자 비로소 사랑하는 여인이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흰 베일에 올리브 관을 쓰고 있었으며, 초록색 망토를 걸치고 아래에는 불타는 듯 붉은 색 옷을 입고 있었다. 이 세 가지색은 각각 믿음과 희망과 자비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올리브 관은 바로 지혜의 상징인 미네르바였다.  비록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단테는 그녀 앞에서 ‘옛 사랑의 강력한 힘’을 느끼며 몸을 떤다. 

 

그는 베르길리우스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한다. “온몸의 피가 끓어오릅니다. 옛날의 불꽃의 여운이 되살아났습니다.” 하지만 베르길리우스는 이미 그곳을 떠난 후였다. 안내자이자 스승이 사라지자 단테의 뺨은 눈물로 적셔진다. 그때 베아트리체가 말한다. “단테여, 울지 마세요. 베르길리우스가 떠났다 하더라고 울지 마세요. 당신은 지금 울면 안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는 천사들이 뿌린 꽃구름 속에서 나타났으며, 미네르바 관을 쓴 머리에는 베일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나를 잘 보세요. 나는, 나는 바로 베아트리체랍니다.” 단테는 이 순간을 너무나 기다려 왔었다. 그는 천국에 있는 베아트리체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보고자 수십 년을 기다려 왔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런 상황에 마주치자 그는 아무 말도 어떤 동작도 보일 수 없었다. 이런 그를 본 베아트리체는 투정하듯이 말한다. “어떻게 당신이 이 산에 올 수가 있었는지 아시나요? 여기는 행복의 동산이랍니다.”

 

사실 단테는 이런 속세의 천국에서 행복을 누릴 권리가 없었다. 자기에게 부여된 뛰어난 재능을 함부로 써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젊었을 때 촉망받는 사람이었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그녀를 버리고 방탕한 생활을 했었다. 그는 번민 속에서 베아트리체가 젊었을 당시 그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회상하는 말을 듣는다. 그가 의당 되어 있어야 할 상태와 지금의 상태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는 너무도 깊이 타락했기 때문에, 베아트리체는 파멸한 인간과 고행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서는 그를 구원할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지옥과 연옥을 지난 후 단테는 베아트리체의 안내로 일곱 개의 천국을 지난다. 그곳에는 여러 성인들이 살고 있었다. 베아트리체는 눈물을 흘리며 간청하여 그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그의 사랑하는 베아트리체는 하느님의 왕국으로 여행하면서 더욱 아름답고 화사하게 변해 있었다. 단테는 그녀의 눈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진정한 사랑이란 절대적인 진리이자 회상의 신에 대한 사랑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떠나 축복 받은 사람들 속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맨 마지막 지고천에서는 베아트리체 대신 성 베르나르도가 단테를 안내하고, 또 성모 마리아가 단테를 위해 기도한다. 그곳에서 그는 새하얀 장미꽃 모양의 축복 받은 사람들과 천사, 그리고 삼위일체의 신비를 보게 된다.

 

한편, 단테는 그의 마지막 인생을 귀도 노렐로 공의 초청을 받아 토스카나지역의 라벤나에서 지내게 된다. 그 무렵 아들 야코보는 베로나 교회에서 성직의 녹을 받고 지냈으며, 딸 베아트리체는 라벤나 근교의 성 스테파노 여자수도원의 수녀가 되어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자기의 걸작을 완성한다. 그는 1321 베네치아 공화국과 협상을 벌여 귀도 노벨로 공의 사절로 귀국 길에 오르다가 말라리아 병으로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유해는 라벤나의 성 프란체스코 교회에 안장된다. 후에 피렌체에서 단테의 유해를 그가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땅으로 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단테를 아끼는 라벤나 시민들이 이를 거절하여 그는 아직도 이국 땅에서 잠들고 있다.

그는 오래 전에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던 여인을 잃고 혼자 방랑의 세월을 지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원대한 상상 속에서 영원히 그녀와 함께 있었으며, 그녀는 그에게 육체적이며 세속적인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으며, 동시에 최고의 사랑이란 바로 천국으로 들어가는 열쇠라는 사실을 이해시킨 여인이었다. 

 

<신곡>에서 단테는 말한다. “그녀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베아트리체가 말한다. “나는 내 눈으로 당신을 지켜보고 있어요. 청순한 사춘기의 눈으로 당신을 진정한 길로 인도했어요.” 이렇듯 베아트리체는 맥박이 고동치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단테의 상상 속에서 이상화 된 여인에 불과하다. 그리고 베아트리체와 단테의 사랑이 결코 파란 많은 역사를 지닌 것도 아니면서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해지는 이유는 바로 사랑의 참뜻을 단테가 <신곡>을 통해,  베아트리체와의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8. 단테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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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베키오 궁전(Palazzo Vecchio) 

   

베키오 궁전은 1298년에 착공하여 완성되었는데, 몇 번에 걸친 개조공사를 통해 16세기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1540년에 코시모 공작 1세의 명으로 건축가 바사리가 내부를 개조하였다. 일찍이 피렌체 공화국(토스카나 공화국)의 청사였던 건물로, 현재 피렌체의 시청으로 사용되고 있다.

 

궁전 오른쪽 입구로 계단을 올라가면 대청으로 들어서게 되며, 대청 양쪽 벽면에는 바사리와 그 일파가 그린 메디치의 전투장면이 전시되어 있다. 3층에는 기를란다요의 로마 영웅들을 표현한 프레스코화가 있으며, 그밖에도 마키아벨리 초상화, 프란체스코 1세의 방, 지구의 방 등 옛날 피렌체의 부와 힘을 느끼게 하는 유물들이 많다. 특히, 탑의 높이는 94 미터로서 피렌체 대성당(두오모 성당)의 종탑 높이(84 미터)보다 더 높은 것은 많은 부를 축적한 중상계층들이 당시 기독교(교황)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상징적 표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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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Medici) 가문’의 흥망성쇠

 

메디치 가문은 이탈리아의 중부지방 피렌체 공화국의 평범한 중산층 가문이었으나, 은행업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하면서 유명해졌다. 메디치 가문이 역사에 드러난 때는 1400년부터이며, 이때부터 1748년까지 약 350년간 지속되었다. 메디치 가문의 역사를 보면 피렌체 공화국에서 공직을 맡아 수행했던 인물들이 배출되기는 하였으나, 전통적으로는 상업을 통해 재력을 가진 평민가문이었다. 1378년 가문의 한 사람인 살베스토로는 시의회에서 평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강경한 연설을 하여 치옴피(Ciompi; 방직노동자 길드)의 반란이 일어나도록 했다.

 

메디치 가문에는 이때부터 대중의 입장을 지지하는 전통이 이어졌으며, 1400년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었던 조반니 디 비치(Giovanni di Bicci, 1360∼1429)는 피렌체의 귀족들과 대립하여 평민들의 입장을 옹호하며,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인물이 되었다. 이때부터 조반니를 중심으로 메디치 가문은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메디치 가(家)는 유럽 전역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하였고, 교황청과 거래로 막대한 부를 쌓아갔다. 이를 기반으로 정계에도 진출하여 피렌체 공화국의 수반인 곤팔로니에레에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귀족에게 유리한 세금제도를 철폐하고, 평민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혁신하였으며, 상당한 돈을 공화국에 기부하여 귀족과 평민 양쪽의 지지를 받았다. 문예부흥사업에도 자금을 쏟아부었다. 당시 세례당의 청동문을 제작을 두고 일어난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의 경합이 이때 일어난 일이며, 피렌체에서 문예부흥운동인 르네상스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조반니가 죽고 그의 아들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 Cosimo)가 뒤를 이었으나, 피렌체의 귀족들과 대립하여 수년 동안 추방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 후 민중의 지지와 상업자본에 힘입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피렌체 공화국의 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국부’(國父)의 칭호를 받았다. 그는 유럽의 16개 도시에 은행을 세우는 한편, 교황청 자금의 유통을 맡아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으며, 막대한 사재(私財)를 시정(市政)에 투입하고 학예(學藝)를 보호하고 장려하였다. 그로부터 미켈로초, 도나텔로, 프라 안젤리코, 기베르티, 도나텔로 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후원을 받았으며, 그 결과 르네상스의 걸작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코시모의 손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 일명 로렌초 일 마그니피코)는 위대한 자로 칭송되었으며, 이때 피렌체와 메디치 가의 번영은 정점에 달하였다. 그의 뛰어난 외교수완으로 피렌체가 이탈리아 정치의 중추적 지위를 차지하였다. 피렌체의 르네상스 문화가 최고조에 이른 것도 이 때인데, 인문주의적 교양을 폭넓게 지녔던 그는 학예, 특히 철학연구를 장려하였다.

 

그러나 메디치가에 대한 귀족들의 견제도 심해졌으며 독재자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여러 번의 암살기도로 위협을 받기도 하였는데, 피렌체 공화국의 주도권을 노리던 교황 식스투스 4세가 주도하여 일어난 파치가의 음모로 결국 그의 동생 줄리아노가 처참하게 사망하였다. 당시 메디치 가문은 학문에 대한 장려와 보호를 위해 자금을 아끼지 않았다. 수많은 고전문헌들을 수집하여 그리스 아카데미를 피렌체에 설립하였다. 주변국의 학자들은 피렌체로 모여들었다. 또한, 베로키오는 로렌초를 위해 작품을 제작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로렌초에 의하여 선발되어 위대한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으며,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 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로렌초의 후원과 지원으로 예술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펼쳤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피에로 2세(1471∼1503)가 무능하여 프랑스왕 샤를 8세의 침입을 받고 이에 굴복하자 시민들은 반발을 하였다. 이에 그는 피렌체 공화국에서 1494년 추방되었다. 그 후 메디치가는 1512년 피렌체로 복귀하여 교황 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를 배출하면서 다시 부활하였다. 독일의 황제 카를 5세가 남하(南下)했을 때(로마의 약탈), 잠시 피렌체를 쫓겨난 메디치가는 얼마 후 황제의 힘을 빌려 복귀하였다. 또한 카트린 데 메디치는 프랑스왕 앙리 2세의 왕비가 되었고, 마리 데 메디치는 프랑스왕 앙리 4세의 왕비가 됨으로써  메디치가는 혼인을 통하여 프랑스 왕실의 일원이 되었다.

 

이후 교황 클리멘스 7세가 가문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메디치가의 장자였던 알렉산드로가 죽자 장자계열의 후손이 끊어지고 말았다. 가문을 이은 먼 친척인 조반니의 차자계 후손인 코시모 1세(1569∼1574)가 1569년 토스카나 대공(大公)이 되었다. 그의 아들 프란체스코(1541~1587)는 과중한 세금을 거둬들여 경제를 거의 파탄지경에 몰고 갔으나, 예술과 과학의 후원했던 업적은 높이 평가을 받는다. 그 후 차차 세력이 쇠퇴하여 1737년 7대째의 대공(大公) 잔 가스토네의 죽음으로 메디치 가의 350년간의 번영은 막을 내렸다.

 

메디치 가문의 몰락 원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베키오 다리의 ‘바사리 통로’(Vasari Corridor)의 내부에 있는데, 그 벽에는 메디치 가문이 소장했던 예술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원래 베키오 다리에는 정육점이 늘어서 있었지만 코시모 1세는 바사리 통로를 만들기 위해 정육점을 모두 없애고, 그곳에 피렌체의 보석상들이 상점을 열게 하였다. 지금도 베키오 다리 위에는 보석상이 즐비하다.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던 메디치 가문은 채 350여 년을 넘기지 못하고 몰락하였다. 당대 최고의 부자였으며 두 명의 교황과 두 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했던 위대한 가문이 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을까? 메디치 가문이 몰락의 조짐을 보인 것은 피렌체의 대공으로 등극했던 코시모 1세(1519∼1574) 때의 일이다. 그는 15세기의 동명이인(同名異人)이었던 가문의 위대한 조상,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와 전혀 다른 유형의 리더였다. 대중의 시선에서 벗어나 늘 신중하고 겸손하게 행동했던 국부(國父) 코시모와는 달리, 16세기의 코시모는 권력을 독점한 황제처럼 거들먹거렸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사돈이 되면서부터 어깨에 더욱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 코시모는 피렌체 시민들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다. 그는 1565년 건축가 조르조 바사리에게 특별한 명령을 내렸다. 아들 부부가 사는 베키오 궁전부터 자신의 왕궁인 피티 궁전을 연결하는 전용 비밀통로를 설치하도록 한 것이다. 건축가의 이름을 따서 ‘바사리 통로’로 부르는 이 비밀주랑은 피렌체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를 대비한 메디치 가문의 전용 도피통로로 설계되었다. 그래서 안에서 밖을 내다볼 수는 있으나, 반대로 밖에서 안은 볼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이때부터 메디치 사람들은 바사리 통로에 설치된 비밀스러운 창문을 통해 피렌체 사람들을 은밀히 감시하였다. 폭군처럼 군림하는 것도 모자라 시민들을 통제하는 비밀스러운 감시자가 된 것이다. 메디치 가는 비사리 통로에서 세상과 단절되기 시작했다.

 

역사가들은 메디치 가문이 문을 닫게 된 직접적인 원인을 코시모 3세(1642∼1723)의 오랜 통치기간에 반복해서 나타난 리더십의 부재에서 찾는다. 그는 무절제한 주색잡기로 악명을 떨쳤으며, 급기야 결국 그는 불규칙한 폭식으로 만성적인 질환까지 얻게 되었고, 그의 주치의는 규칙적인 걷기 운동을 처방하였다. 비만에 시달리던 코시모 3세가 운동 장소로 찾아낸 곳은 800m에 이르는 바사리 통로였다. 그는 이 긴 회랑에서 걷기운동을 할 때 무료함을 달래려고 가문이 소장하고 있던 모든 조각품을 일렬로 전시하도록 하였다. 피렌체가 배출했던 위대한 천재들에 의해 탄생한 예술품이 비만에 시달리던 한 개인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눈요깃거리로 변해 버렸다.

 

후대의 코시모들이 선대 코시모의 정신을 유산으로 계승했더라면 메디치 가문이 쉽게 패망의 길로 접어들진 않았을 것이다. 선대 코시모는 아버지의 유언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임종의 침상에서 조반니 디 비치는 아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다른 사람들이 널 주목하게 만들지 말고,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라. 만약 사람들 앞에 서야 한다면 꼭 필요한 곳에만 너의 모습을 보여줘라. 대중의 시선에서 멀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절대로 대중의 뜻에 거슬리게 행동하지 말라.”

 

아버지의 유언은 한마디로 신중하고 겸손하게 처신하라는 것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부가 축적되고 가문의 명예가 올라갈수록 이를 시기하는 사람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선대 코시모는 절대로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협상을 하다가 의견 절충에 실패하면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게 아니라 웃으면서, “그래요, 잘 알겠습니다. 제가 다시 한 번 검토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코시모는 피렌체 시내에서 이동할 때 절대로 말을 타지 않았다. 말을 타고 다니면 피렌체 시민들과 노상(路上) 대화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위화감이 조성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코시모는 피렌체 시내를 걸어 다니면서 마주치는 주민들에게 늘 웃음으로 대했다. 장거리 이동 때는 말 대신 당나귀를 애용했다고 한다.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겠다는 의지를 당나귀를 타고 가며 보여준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코시모의 생애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대단히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중후하고 예의 바르고 덕망 넘치는 외모를 갖고 있었다. 초년은 고통과 유배와 신변 위협 속에서 지냈으나, 관대한 성향 덕에 모든 정적을 누르고 백성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거부(巨富)이면서도 살아가는 모습은 검소하고 소탈했다.”

 

메디치 가문의 대는 끊겼지만, 가문의 정신은 지금도 살아 숨을 쉬고 있다. 21세기의 피렌체 사람들은 18세기 중엽에 문을 닫은 메디치 가문의 덕분에 살아갈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 시민들에게 남긴 문화유산은 막대하다. 우피치 미술관과 피티 궁전 박물관에 소장된 예술품들을 보려고 몰려드는 관광객들에 의해 피렌체 시의 재정이 탄탄해지고 있다.

 

위대한 정신은 위대한 가문을 낳았고, 그 정신이 쇠퇴했을 때 가문은 문을 닫았다. 메디치 가문은 정신의 위대함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역사적 선례를 남겼을 뿐 아니라, 위대한 정신이 쇠퇴했을 때 가문의 역사도 끝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 교훈이야말로 메디치 가문이 남긴 문화유산보다 더 값진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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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

 

수세기 동안 피렌체의 정치·사회적 중심지였으며, 현재는 카페 테라스가 있는 휴게장소이다. 광장 부근 베키오 궁전에 있는 종루의 종은 시민들을 공공집회에 불러모으는 데 사용되었다. 광장에는 피렌체를 일으킨 코지모 데 메디치의 동상이 있고,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동상 《다비드》의 모조품과 메두사의 목을 벤 페르세우스의 청동상인 《첼리니의 페르세우스》, 잠볼로냐의 《사빈 여인의 강간》 등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 모조품들이 있다. 광장 중앙에는 한때 피렌체를 지배했던 수도승 사보나롤라의 처형지임을 알리는 화강암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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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진품 '다비드'는 대리석 조각작품으로, 높이는 410㎝ 이다. 이는 원래 '시뇨리아 광장'에 있었으나, 1873년 시내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다비드(다윗)은 구약성서 사무엘서 17장에 나오는 골리앗을 죽인 16세의 소년이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은 물맷돌을 어깨에 둘러메고 강렬한 눈빛으로 골리앗을 노려보고 있는 싸움 직전의 긴장된 순간으로 표현하였다. 미켈란젤로는 다비드르,ㄹ 부분적으로는 이상적인 성인남성으로, 또 부분적으로는 미성숙한 청소년으로 표현하였다.

 

다비드상의 특징은 첫째, 종교적인 주제를 아름답고 조화있게 표현하였다는 점이다. 둘째, 눈동자에 하트모양을 넣었는데 이는 멀리서 보면 실제 눈동자처럼 입체감이 나타난다. 셋째, 그리스를 능가하는 조각작품을 재현하였다. 넷째, 골격과 근육, 특히 손을 정교하게 표현하였는데, 이는 정확한 해부학에서 나온 결과이다. 실제로 미켈란젤로는 10번 이상의 해부 경험을 가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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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비드' 진품 (아카데미아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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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우피치 미술관(Galleria degli Uffizi)

 

우피치 미술관은 '베키오 궁전'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양 날개 건물과 팔라초 베키오로 구성되어 있다. 화려한 르네상스식 3층 건축물로 '우피치 궁전' 내에 있는데, 1층에는 예배당도 함께 있다. 이곳은 현재 르네상스 회화의 컬렉션으로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세계 제일의 미술관이라고 할 수 있다. 우피치(Uffizi)는 영어의 '사무실'(office)을 뜻하는데, 이 건물은 본래 피렌체 공화국의 행정국이었다. 토스카나(Toscana) 지방은 고대 에트루리아 영토의 대부분을 포함하였는데, 11세기부터 르네상스 시대에 걸쳐 대부분의 도시는 자유도시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피렌체·시에나·루카·피사 등이 특히 번영하여 이 도시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이 되었으며, 1569년 이후 19세기에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기까지는 토스카나 공국령(公國領)을 이루었는데, 주도(州都)는 피렌체였다.

 

초대 토스카나 대공(大公)이 된 메디치 가(家)의 코시모 1세(1519~1574)가 1560년경 피렌체의 행정ㆍ사법기관을 한 곳에 모으기 위한 건물 건립을 조르조 바사리에게 명령한다. 14년 후 바사리는 메디치 가문의 사무소이자, 피렌체 공화국의 행정국(정청(政廳))인 이 건물을 완성했다. 따라서 이 건물을 우피치궁(宮)이라고도 한다.

 

현재는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는데, 고대 그리스 미술부터 현대 작품까지 2,500여 점의 작품을 소장 및 전시하고 있다. 특히 르네상스 회화의 걸작을 다량 보유하고 있다. 2층은 데생과 판화, 3층은 회화 전시실이다. 이 미술관의 역사는 이 건축이 완성된 1584년에 시작되나, 미술품 수집의 역사는 더 오래 되어, 15세기 전반부터 피렌체에 군림한 메디치가의 코시모 일 베키오(1389∼1465)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메디치가의 최후의 6대 토스카나대공 잔 카스토네(1671∼1737)까지 거의 200년간에 막대한 미술품 제작을 예술가들에게 의뢰하고 또 작품이 수집되었다. 코시모 1세의 시대부터, 각지에 분산되어 있던 메디치가와 그 집에 연고가 있는 미술품을 여기에 모으기 시작하여, 1737년 메디치가의 최후의 사람으로서 우피치궁의 미술품을 계승하고 있던 안나 마리아 루드비카가 토스카나 대공국에 기증하였고, 그녀의 뜻에 따라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그 후 이탈리아 통일에 의하여 국립미술관이 되어 1800년에 조각류가 국립바르젤로미술관과 국립고고미술관에 분할되었다. 현재 3층에 회화, 2층에 소묘와 판화, 1층에 고문서류를 수장하고 있다. 회화에는 14∼16세기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화가뿐만 아니라, 17∼18세기의 바로크와 로코코의 화가, 독일과 플랑드르의 북방 르네상스 화가들의 중요한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조토의 <성모자(聖母子)>,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봄>과 <세 동방박사의 경배>와 <팔라스와 켄타우로스>와 <비방>과 <마니피캇의 성모>와 <코지모 메디치의 메달을 든 남자의 초상>과 <수태고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동방박사의 예배>와 <수태고지>, 미켈란젤로의 <성가족>, 라파엘로의 <검은 방울새의 성모(마돈나, 마리아)>와 <율리우스 2세 교황의 초상화>와 <마돈나>와 <레오 10세와 두 추기경의 초상>과 <자화상>,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플로라>, 마르티니의 <수태고지(受胎告知)>, 카라바조의 <메두사>와 <바커스>, 뒤러의 <삼박사(三博士)의 예찬>, 휘스의 <목자(牧者)들의 예배>, 시모네 마르티니의 <두 명의 성자가 있는 수태고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의 초상>, 아르테미시아(세계미술사에 등재된 최초의 여성화가)의 유디트(Judith)>, 파르미지아니노의 <긴 목의 성모>, 샤르댕의 <셔틀콕을 든 소녀>,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의 <동방박사의 경배>, 엘리자베스 비제의 <자화상>, 로렌츠 로토의 < 수산나와 장로들>, 로소 피로렌티노의 <악기를 연주하는 아기천사>, 조르지오 바사리의 <불카누스의 대장간>, 파올로 우첼로의 <산 로마노 전투>, 줄리아노 부자르디니의 <여인의 초상화> 등인데, 유명 작품은 주로 3층에 전시되어 있다.

 

한편, 미술관 한 모퉁이에는 '바사리의 회랑'이라는 긴 복도 모양의 건물이 베키오 다리로 이어져 있다. 베키오 궁전과 아르노강 건너편의 피티궁전을 연결하는 이 회랑은 길이가 약 1km에 이르며 세계 최대의 초상화 전시로 유명하다. 아카데미아 미술관과 마찬가지로 예약을 하지 않으면 2~3시간을 기다려야 입장할 수 있다. 미술관 건너편에 예약하는 곳이 있으니 관람 하루 전에 미리 예약하는 것이 좋다. 미술관 공통 예약사무소(055 294883/2347941, 영어 가능)에 전화해 이름과 국적, 희망 날짜와 시간을 말하고 예약 번호를 받으면 된다. 홈페이지에서도 예약이 가능하다.

 

<관련 사이트>

우피치 미술관http://www.yourwaytoflorence.com/db/musei/uffizi.htm

네이버 캐스트 (우피치 미술관)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5415 

네이버 블러그 (우피치 미술관) :  http://blog.naver.com/helmut_lang?Redirect=Log&logNo=150036386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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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 입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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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태고지' :  천사 가브리엘이 성모 마리아에게 그리스도의 수태를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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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티니의 '수태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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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티첼리의 '수태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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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족' : 요셉이 아기 예수를 성모 마리아의 뒷쪽에서 어깨 너머로 건네보는 자세로 그려져 있는데, 이는 구약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약속(신약)이 시작됨을 상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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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피티 궁전 (팔라초 피티, Palazzo Pitti)

 

피티 궁전은 피렌체 피티 가(家)의 15세기 대저택이다. 1448년 은행가 루카 피티(Luca Pitti)가 위세등등한 라이벌 가문인 메디치가(家)를 누르려고 짓기 시작하였으나, 건물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1549년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1세(Cosimo I de’Medici, 1519~1574)가 취득한 후 완성하였다. 이는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했다고 추정된다. 원래는 현재의 규모보다 작게 지어질 예정이었으나, 소유권이 메디치가로 이전된 후 1549년에 확장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확장되고 개조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피렌체가 이탈리아의 수도였을 시절에는 로레인(Lorraine) 왕조와 사보이아(Savoia) 왕조의 저택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오늘날 피티 궁전에는 여러 개의 박물관과 갤러리가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팔레티나(Palatine) 갤러리는 대공의 개인적 수집품부터 15~17세기 티치아노(Titian), 라파엘(Raphael), 루벤(Ruben) 등 유명한 화가들의 걸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이외에도 현대 미술 갤러리(Gallery of Modern Art), 은 박물관(Silver Museum), 의상 갤러리(Costume Gallery), 마차 박물관(Carriage Museum), 자기 박물관(Porcelain Museum) 등 재미있는 박물관이 있다.궁전 정원인 ‘보볼리 가든’(Boboli Garden)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에 속한다. 메디치 가문이 피티 궁전을 매입한 후인 1549년 트리볼로(Tribolo)에 의해 디자인되었다. 르네상스식 정원으로 숲, 가로수길 사이로 조각상들이 잘 어우러져 있으며, 정원에서는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 나와 유명해진 두오모 성당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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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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