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독일 지도
2. 로맨틱 가도(Romantic Road; 固城 街道)
3. 루트비히 2세(Ludwig Ⅱ)의 삶, '호엔슈방가우 성' & '노이슈반스타인 성' 이야기
4. 호엔슈방가우 성
5. 노이슈반스타인 성 (백조의 성)
6. '노이슈반스타인 성' 주변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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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일 지도
※ 독일 여행코스 :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Innsbruck) ⇨ 독일 퓌센(Fussen) ⇨ 로텐부르크
(Rothenburg) ⇨ 뉘른베르크(Nuremberg) ⇨ 뷔르츠부르크(Wurzburg) ⇨
프랑크 푸르트(Frankfurt) ⇨ 인천공항
2. 로맨틱 가도(Romantic Road; 固城 街道)
로맨틱 가도란 중세의 고풍스러운 모습을 간직한 소도시들이 잇닿아 있는 약 366km의 도로를 말한다. 즉, 독일 중남부의 뷔르츠부르크(Wurzburg, 0km)에서 남쪽으로 타우버비쇼프스하임(Tauberbischofsheim, 31km), 라우다-쾨니히쇼펜(Lauda-Königshofen, 41km), 바트 메르겐트하임(Bad Mergentheim, 51km), 바이케르스하임(Weikersheim, 63km), 뢰팅겐(Röttingen, 71km), 크레글린겐(Creglingen, 79km), 로텐부르크(Rothenburg, 98km), 실링스퓌르스트(Schillingsfürst, 115km), 포이흐트방겐(Feuchtwangen, 131km), 딘켈스뷜(Dinkelsbühl, 143km), 발러슈타인(Wallerstein, 165km), 뇌르들링겐(Nördlingen, 172km), 하르부르크(Harburg, 192km), 도나우뵈르트(Donauwörth, 204km), 아우그스부르크(Augsburg, 248km), 프리드베르크(Friedberg, 254km), 란드스베르크 암 레흐(Landsberg am Lech, 294km), 호헨푸르흐(Hohenfurch, 314km), 숀가우(Schongau, 317km), 파이팅(Peiting, 329km), 로텐부흐(Rottenbuch, 330km), 빌드슈타이히(Wildsteig, 336km), 슈타인가덴 & 비스키어헤(Steingaden und Wieskirche, 343km), 할블레흐(Halblech, 352km), 슈방가우(Schwangau, 362km),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에 가까운 퓌센(Füssen, 366km)에 이르기까지 중세의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는 여러 소도식들을 연결하는 도로를 지칭한다. 이 도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관광객 유치를 위하여 재개발되었다.
독일 남부의 젖줄인 마인 강, 타우버 강, 레흐 강을 따라 중세풍의 옛 독일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하며 꿈과 낭만이 스며있는 동화를 들려주는 ‘로맨틱 가도’는 한동안 여행자들의 발걸음을 묶어 두기에 충분하다. 울창한 숲을 지나다 보면 느닷없이 고풍스런 고성이 나타나 중세로 온 것 같은 색다른 느낌이 든다. 차창 밖으로는 부서지듯 전원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지고, 알프스 산자락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도시생활에 찌든 영혼을 맑게 해준다. 특히, 동화 속에서나 한 번쯤 본 듯한 풍경은 ‘로맨틱 가도’의 종점인 퓌센(Füssen)에 응축되어 있다.
3. 루트비히 2세(Ludwig Ⅱ)의 삶, '호엔슈방가우 성' & '노이슈반스타인 성' 이야기
퓌센(Fussen)은 로맨틱 가도의 남쪽 종점 도시이면서, 알프스의 한 자락에 위치하고 있어 주변에 아름다운 호수가 있으며, 빼어난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어 훌륭한 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이 곳은 중세 분위기를 자아내는 아름다운 동화의 고성들(호엔슈방가우 성, 노이슈반스타인 성, 린더호프 성 등)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퓌센에는 예사롭지 않으면서도 어두운 삶의 그림자를 짙게 남긴 채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린, 불운한 삶을 살다 간 바이에른(Bayern) 공국(1806년 왕국으로 승격한 제후국으로, 독일연방 중 가장 부유하였으며, 수도는 뮌헨이었음)의 왕인 루트비히 2세(Ludwig Ⅱ)와 관련된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와 같은 흔적이 곳곳에 스며있어 매년 수백만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1) 루트비히 2세의 삶
루트비히 2세는 바이에른 공국의 국왕 막시밀리안 2세와 프로이센 공주 마리 사이에서 1845년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무서운 아버지이자 절대군주의 아들이었지만, 아버지와는 달리 어릴 때부터 여성적이며 예민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지녔는데, 이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특유 성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미모와 정신적 편향성 등의 성향을 그대로 이어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성향은 그의 동생인 오크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그는 검술이나 기마 대신 연극과 오페라를 매우 좋아했으며 음악, 시, 미술과 같은 예술의 세계에 빠져있었다.
루트비히 2세는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키 190㎝의 미남으로 성장하였는데, 아버지가 죽자 1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왕으로 즉위하고 나서도 정치에는 큰 관심이 없었으며, 전쟁보다는 평화를 좋아하였다. 따라서 궁전이 있는 뮌헨보다는 별장과 같은 곳에서 전원생활을 하는 것을 훨씬 더 좋아했다. 그러한 가운데 그의 훌륭한 외모 때문에 그는 유럽 왕족들 사이에서 많은 관심을 얻었다. 그는 원래 이종사촌누나인 시씨 엘리자베트를 사춘기때부터 짝사랑했지만, 그녀가 오스트리아 황태자인 프란츠 요제프와 결혼하는 바람에 실연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 이후 시씨 엘리자베트는 안타까운 마음에 루트비히 2세에게 자신의 막내동생인 소피 샤를로테를 소개해주어, 그녀와 약혼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결혼을 자꾸 미루어오다가 드디어 결혼날짜를 정하고 황금마차와 기념주화까지 준비했으나, 결혼식 이틀을 앞두고 끝내 파혼하고 말았다. 아마 그는 특유의 정신적 편협성과 청소년시절의 열렬한 짝사랑 실패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그의 성적 취향은 더욱 동성애적 성향으로 바뀌게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루트비히 2세의 삶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은 바로 바그너(Wagner, 1813~1883)이다. 루트비히 2세가 16세가 되던 1816년 아버지와 함께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관람하면서부터 그의 열정적인 팬이 되었다. 그가 2년 뒤 왕위에 오르면서 한낮 가난한 무명의 음악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는 바그너는 영광스러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루트비히 2세 역시 그 자신의 인생에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사실, 바그너는 루트비히 2세를 만나기 전 유랑극단의 악단장으로 연주활동과 소규모 오페라를 공연하였지만 신통치 못하였으며, 대표작인 <탄호이저>까지 흥행에 실패하면서 많은 부채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음악가에게 나타난 바이에른의 국왕 루트비히 2세는 그야말로 기적처럼 나타난 구세주였으며, 바그너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군주로서 그의 앞날을 터주었다. 빚을 모두 청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물론, 바그너가 음악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모든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바그너에 대한 열정과 지원은 점차 더 강해졌다.
이리하여 바그너는 왕에게 “오, 은혜로 충만한 왕이시여! 천상의 감동에서 솟아난 눈물을 당신께 바침으로써, 그리고 비천하고 애정에 굶주려왔던 제 가련한 인생이 품고 있던 시적 경이감이 드디어 지고한 현실이 되었음을 당신께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이제 이 인생의 마지막 한 단어까지, 마지막 한 음계까지 저의 인생은 당신께 속해 있습니다.”라고 적은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많은 역사가들은 루트비히 2세가 바그너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졌던 사실을 근거로 루트비히 2세가 바그너에 대하여 이성적으로 끌렸을 것이며, 둘 사이에는 아마 동성연애적 감정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외에도 루트비히 2세는 3명의 남자와 동성연애를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는 헝가리의 배우 조세프와의 염문설이다.
당시 유럽의 정세는 매우 급박하였는데, 프로이센과 프랑스가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뮌헨의 귀족들이 왕권을 장악하려고 갖가지 음해를 펼쳤다. 이로 인해 감수성이 예민한 성격의 루트비히 2세는 1880년대 초부터는 거의 세상과 인연을 끊고, 수도인 뮌헨을 떠나 퓌센에 은둔하였다. 그는 나라를 통치하는 것보다 아름다운 성을 짓는 것을 더 좋아하여, 어느 일보다 이에 열성적이었다. 특히, 바이에른 산지에 성을 건축하는 데 몰두하였다. 자신이 직접 설계한 노이슈반스타인 성 뿐만 아니라 린더호프 성('트리아농 궁전'을 모방한 것으로, 1869년~1878년에 건축되었음. 노이슈반스타인 성 근처 마을에서 가까운 계곡(오버아머가우)에 지어졌는데, 여기에서 왕은 철저히 고독생활을 즐겼다고 함)과 헤른킴제 궁전(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한 것으로, 1878~1885년에 걸쳐 '킴제 호수'의 한복판에 지어졌으나, 이는 미완성의 건축물임)을 건축하는 데 몰두하였다. 그는 낮동안에는 잠을 많이 잤으며, 밤이면 백마가 끄는 황금마차나 황금설매를 타고 성 주변으로 산책을 나가는 것과 중세 기사의 갑옷을 입는 것을 즐겼다. 그러면서 그는 프랑스의 루이 14세를 동경하면서, 루이 14세가 '태왕의 왕'이라면 자신은 '달의 왕'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한편, 그는 특유의 성향과 영양 불균형 및 과음 등으로 인하여 멋진 외모는 볼품없는 모습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도 뮌헨에서는 루트비히 2세를 미친 사람으로 몰아가기 시작하였는데, 이에 대해 그의 주치의인 구텐 박사가 나서서 반박하고, 왕실의 충신들은 왕이 꿈 속에 빠져 사는 괴짜일지언정 미친 사람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정적들은 마침내 그를 ‘정신병자’라고 몰아세웠다. 특히, 1886년 6월 그의 숙부이자 왕위계승권자인 루이트폴트 공은 그에게 금치산 선고를 내리고 섭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루트비히 2세가 기거하고 있던 노이슈반스타인 성으로 병사들을 보냈으나, 이 소식을 전해들은 마을주민들이 몰려와 왕을 보호하여 그의 납치는 일단 실패하였다. 그러나 성에 잠입해 있던 병사들에 의해 결국 뮌헨 남쪽에 있는 아버지의 '호헨 백조의 성'에 감금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노이슈빈스타인 성에서 실제로 6개월도 채 기거하지 못했다.
루트비히 2세는 감금된 지 사흘 뒤인 1886년 6월 13일 41세의 나이로 인근의 슈타른베르거 호수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그는 주치의인 구텐 박사와 함께 그날 새벽 6시에 그 호숫가로 산책을 나갔으나, 저녁 8시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는데, 마침 기상상태가 좋지 않아 그는 밤 11시 30분경에서야 얕은 호숫가에서 주치의와 함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때 그의 시계는 6시 54분에 멈춰져 있었다.
뮌헨에서는 루트비히 2세가 주치의를 죽인 후 호수에 뛰어들어 자살했다고 공식 발표했지만, 여기에는 오늘날까지 많은 의문점들이 남아 있다. 그 이유는 우선 루트비히 2세의 뛰어난 수영 실력, 주치의가 이 날 경호원들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지시한 점, 발견 당시 주치의의 머리에 난 상처, 그리고 무엇보다도 왕의 폐에서 물이 발견되지 않은 점 등이다. 훗날 루트비히 2세의 시신이 발견된 슈타른베르거 호수가의 그 자리에 '동화의 왕'을 아끼는사람들이 십자가를 세워 그를 애도하고 있다.
한편, 루트비히 2세는 신하들의 교육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지역주민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전쟁을 피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왕으로 칭송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바이에른 사람들은 그 왕을 매우 아끼고 진정으로 좋아하며 존경하였다. 루트비히 2세의 기구한 삶이 담긴 퓨센지역, 특히 노이슈반스타인 성... 이곳은 그 아름답고 신비로움으로 마치 세상과 동떨어진, 그래서 더욱 성스럽고 아름다워 보이면서도, 슬프고 또 애절하다.
2) 호엔슈방가우 성
루트비히 2세가 유소년 시절을 보냈던 '호엔슈방가우 성'은 12세기에 처음 지어졌는데, 나폴레옹의 침입으로 파괴되어 버려져 있던 것을 그의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가 1832년에 사들어 네오고딕양식으로 개축하였다. 알프스 호수(백조의 호수)가 바라다 보이는 언덕 위에 위치한 이 성은 파란 하늘 아래 노랗게 물든 외벽이 너무나 아름답다.
성 안으로 들어서면 중세의 전설로 내려오는 바바리안 기사와 영웅들을 그린 벽화들이 있고, 방들은 동양 미술품과 진귀한 예술품들로 장식되어 있어 성의 겉모습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3층에 있는 루트비히 2세의 방 안으로 들어서면 고귀하고 순박한 그의 향기와 숨결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전해진다. 특히, 백조의 호수를 향한 작은 창문으로 햇살이 쏟아지면 성모 마리아가 어린 예수를 품에 안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가 호수보다 더 맑고 깨끗하게 비친다. 따뜻하고 푸근한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어린 예수는 마치 심약하고 감성적인 루트비히 2세를 닮았고, 작은 방 한구석에 자리 잡은 낡은 피아노를 통해 애절한 삶의 그림자를 감춘 그의 흔적들을 엿볼 수 있다.
3) 노이슈반스타인 성
루트비히 2세의 감성은 ‘호엔슈방가우 성’ 아래에 있는 ‘노이슈반스타인 성’으로 가면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다. 노이슈반스타인 성은 루트비히 2세가 직접 설계하여 1869년부터 1886년에 걸쳐 자신의 전 재산을 털고 그것도 모자라 은행대출을 받아가면서 지었는데,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이나 <탄호이저>에 심취하여 그 무대였던 중세 기사의 성을 현실로 재현하였다. 동화의 나라에서 튀어나온 듯한 이 성은 일명 '백조의 성'이라고도 불리는데 ,‘로맨틱 가도’의 백미이자 피날레를 장식하는 성으로서, 디즈니랜드의 '신데렐라 성'의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노이슈반스타인 성은 어린시절 그림책에서 본 것 같은 그리움을 자아내게 하는데, 당시 널리 사용된 보편적인 건축양식과 달리, 오페라의 무대배경처럼 아름답고 환상적인 양식으로 꾸미기 위해 뮌헨 국립극장 무대작가의 도움을 받아 멋있게 지어졌다. 성의 외벽은 흰색과 베이지색 대리석을 사용해 중세의 우아한 멋을 한껏 풍기면서도, 가라앉거나 가볍지 않도록 하얀색으로 장식한 것이 특징이다. 날씬하며 우아한 자태로 건축된 성의 지붕은 여러 개의 남청색 원추들이 푸른 하늘을 향해 솟아올라 예술미를 더하고 유럽풍 바탕에 아랍의 특이한 문양을 가미한 듯 그야말로 동화 속에서나 꿈꿀 법한 너무도 신비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하얀 동화의 성으로 발을 내디디면 루트비히 2세와 함께 바그너의 오페라 한 편을 감상하기 위해 극장을 찾은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벽에 걸린 모든 벽화와 그림들이 마치 오페라의 등장인물과 배경을 옮겨 놓은 것 같아, 바그너의 음악세계가 살아서 숨쉬는 듯하다. 거실에는 오페라 <파르치팔>과 <로엔그린>의 배경과 등장인물들이 아름다운 회화로 그려져 있고, 창 쪽 한 귀퉁이에는 사촌누이이자 오스트리아 공주이며, 약혼자인 소피 샤를로트가 선물한 백조모습의 화병이 놓여 있다. 또한, 방문 고리, 커튼, 벽화 등 곳곳에 백조의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거실에서 외부로 이어지는 통로에는 오페라 <탄호이저>, 각 방들에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니벨룽겐의 반지> 등과 관련된 회화들로 장식되어 있어 성 안을 구경하면 할수록 루트비히 2세가 얼마나 바그너의 오페라를 좋아하고 사랑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노이슈반스타인 성에서 루트비히 2세는 실제로 6개월도 채 살지 못했고, 정작 바그너는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성을 관람하고 나면 왜 퓌센이 로맨틱 가도의 피날레를 장식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동화 속의 도시 퓌센, 그리고 루트비히 2세의 감성적이고 신비한 영혼이 눈과 귀 그리고 마음속으로 살며시 스며든 것처럼 그렇게 그 도시를 빠져나오게 된다.
4. 호엔슈방가우 성
6. 노이슈반스타인 성 (백조의 성)
6. '노이슈반스타인 성' 주변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