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프라하, 체스키 그룸로프)
1) 프라하
체코 최대의 경제 · 정치 · 문화의 중심도시 ..... 프라하(Praha)
프라하는 체코 최대의 경제·정치·문화의 중심도시로서, 블타바강(몰다우강) 연변과 라베강(엘베강)과의 합류점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시내를 흐르는 블타바강은 너비가 100~300m이며 몇 개의 강이 있다. 비교적 따뜻하며 습도가 낮고 연 강수량은 508mm이다. 프라하 분지에는 BC 4000년경부터 사람이 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슬라브인(人)이 들어온 것은 5, 6세기로 9세기 말에 성이 축조되었다.
11세기에는 구(舊)시내 광장에서 교역이 시작되었고 12세기에는 이미 중부유럽 최대의 도시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14세기에 이르자 카렐 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시는 더욱 발전하여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당시의 인구는 4만으로 추정된다. 14~15세기에는 후스전쟁의 싸움터가 되었다.
15~16세기에는 고딕 건축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정치적인 의미는 상실하였다. 17세기에는 바로크 건축이 번성하였고 18세기 말부터 다시 수공업 등이 일어나 경제적으로 회복되어 인구도 8만을 헤아렸다. 그 후에도 인구는 늘어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帝國) 최대의 공업도시로 성장하였다.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한 이래 수도가 되어왔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48년의 이른바 2월 사건, 1968년 1월의 ‘프라하의 봄’으로 부르는 자유화운동이 소련 등 바르샤바 조약군(軍)의 침입으로 짓밟힌 역사적인 사건의 무대가 되었다. 1993년 1월 1일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어 체코의 수도가 되었다.
공업도시로서의 프라하에는 100여 개의 기업이 있고 전국 공업생산의 10% 가량을 생산한다. 주요한 것은 기계공업으로, 국영기업의 CKD(전기기관차 등)와 테슬라(모터·방송관계) 등이며 인쇄공업도 중요하다. 식품공업으로는 스미호프의 맥주, 프라하 햄이 유명하고, 그 밖에 의복·제지·화학(주로 타이어) 공업 등이 영위되고 있다. 유럽철도의 대중심지로, 유럽의 각국과 연결되며 하항(河港)이다. 근년에는 항공망의 중심으로 부각되고 있다. 시는 10개의 구(區)로 나누어져 있으며 교외지역으로 계속 발전하고 있다. 시에는 대통령관저·정부·의회 등의 정부기관 및 국제적인 기관 등을 비롯해서 과학아카데미·프라하대학교(1348)·음악대학·도서관·스트라호프 민족자료관(옛 수도원)·박물관·극장·천문대·스포츠시설 등이 집중해 있다.
[야 경] : 야간 시내투어
[프라하 성, 비투스 성당, 왕립 정원]
프라하 성은 체코를 대표하는 국가적 상징물이자,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거대한 성이다. 9세기 말부터 건설되기 시작해 카를 4세 때인 14세기에 지금과 비슷한 모습을 갖추었고, 이후에도 계속 여러 양식이 가미되면서 복잡하고 정교한 모습으로 변화하다가 18세기 말에야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프라하 구시가지의 블타바강(江) 맞은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길이는 570m, 너비는 128m이며, 9세기 이후 통치자들의 궁전으로 사용된 로브코위츠 궁전 외에 비투스 성당, 성조지바실리카, 성 십자가 교회 등 3개의 교회와 성조지수도원 등 다양한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 건설될 당시에는 로마네스크양식으로 지어졌으나, 13세 중엽에 초기 고딕 양식이 첨가되고, 이어 14세기에는 프라하 출신인 카를 4세에 의해 왕궁과 성 십자가 교회 등이 고딕 양식으로 새롭게 건축되면서 이때부터 체코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그 뒤 블라디슬라프 2세 때 후기 고딕 양식이 가미되고, 1526년 합스부르크왕가가 이 지역을 지배하면서 다시 르네상스양식이 도입되었다. 그러다 바로크시대인 1753년부터 1775년 사이에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는데, 시작에서 완성될 때까지 900년이나 걸렸다.1918년부터는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면서 내부 장식과 정원이 새롭게 정비되었다. 왕궁뿐 아니라 성 안에 있는 모든 건축물들이 정교한 조각과 높이 솟은 첨탑, 화려하고 다채로운 장식으로 꾸며져 있어 유럽에서도 중요한 역사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프라하뿐 아니라 체코·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명소이며, 특히 성의 아름다운 야경을 보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바츨라프 광장]
‘바츨라프 광장’은 중세시대 말 곡물시장이 섰던 곳으로 사방이 탁트인 광장이라기보다 드넓은 대로서, 길이는 750m, 너비는 60m이다. 광장이 시작하는 곳에는 체코인들이 수호성인으로 여기는 성(聖) 바츨라프의 기마상이 있는데 여기서 명칭이 유래되었다. 이 기마상 아래에는 '공산주의 희생자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광장 정면에는 세계 10대 박물관으로도 꼽히는 '프라하 국립박물관'이 있다.
지금은 차도와 인도로 나뉘어 있고, 중앙에 녹지가 조성돼 원래 광장의 모습과 많이 다르다. 광장 주변은 상점, 카페, 은행 등이 가득한데, 이들은 대부분 20세기 들어 지은 것이다. 지금은 프라하 최대의 번화가이며, 상업·교통·문화의 중심을 이룬다.
바츨라프 광장은 역사 속에서 여러 차례 대사건이나 프라하 시민의 집회장소로 쓰였다. 특히, 이곳에서 민주화를 부르짖던 학생들이 분신을 했고, 벨벳혁명 때 시민이 모여 민주화를 쟁취했는데, 당시 점령군과 시위대의 격돌로 100여 명이 희생을 당하였다.
·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몰락으로 바츨라프 기마상 밑에서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 출범이 선포되었다.
· 1938년 뮌헨협정으로 독일의 나치 군대가 이 광장을 점령하였다.
· 1948년 공산당의 권력 장악으로 이 광장에서 사회주의공화국이 선포되었다.
·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소련의 무차별 진압이 있었고, 체코 국민들은 이 광장을 중심으로 저항하였다.
· 1989년 민주화 혁명(벨벳혁명)의 중심지가 되었다.
지금 이 광장주변은 프라하의 최고 번화가로, 시민과 여행자에게 만남의 장소 역할을 한다. 광장 이름은 체코의 최초 왕조인 프르셰미슬 왕가의 왕 바츨라프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는 사후에 성인으로 추대받은 체코 기독교의 상징적 인물이다. 바츨라프 동상이 광장 동남단에 성인 4명의 수호를 받으며 서 있다.
(뒤로 보이는 건물은 '프라하 국립박물관')
('프라하 국립 박물관' 앞에는 바츨라프의 기마상이 있고, 소련군 점령시('프라하의 봄' 사건) 대항하다 사망한 대학생들의 추모화단이 소박하게 조성되어 있다.)
무하 미술관(Mucha Museum)
19세기에 파리와 뉴욕을 오가며 활약했던 아르누보의 대표적 화가인 무하(Alphonse Mucha, 1860~1939)의 전시관이다. 무하는 체코의 화가이자 장식미술가로서 아르누보양식의 대표작가로 선적이고 장식적인 문양과 풍요로운 색감, 젊고 매혹적인 여성에 대한 묘사는 아르누보의 정수로 평가된다.
그의 포스터와 장식작품은 실용미술을 순수미술의 단계로 끌어 올리며, 근대미술의 새로운 영역의 등장과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무하의 대표작은 파리에서 그린 포스터들과 4개의 연작시리즈 작품들, 성 비투스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의 밑그림이 있으며, 이외에도 가족들이 보관하고 있는 다양한 작품을 볼 수 있다.
(마하의 밑그림에 의해 완성된 '비투스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화약탑(Powder Tower)
1475년에 고딕양식의 65m의 성문으로 건설되었다. 1757년 러시아와 전쟁 때 화약탑으로 사용되어 개축된 이후 화약탑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현재는 갤러리로 사용되고 있으며 구시가로 들어가는 상징적인 문으로 남아있다.
[구시가 광장]
구 시청사, 천문시계, 틴 성당, 얀후스 동상 등 고딕.르네상스.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이 함께 어울러져 있음
[까를교]
카를교(Charles Bridge)는 보행자 전용다리로 항상 사람들이 붐빈다. 음악과 퍼포먼스를 하는 예술의 다리로 악사와 초상화 그리는 화가, 마리오네트 인형극이 언제나 펼쳐 있다.카를교는 14세기 카를 4세가 블타바 강에 놓은 다리로 너비 10m, 길이 520m에 이른다. 16개 아치가 떠받치고 있는 다리로 유럽 중세 건축의 걸작으로 꼽힌다. 다리의 시작과 끝 부분에 놓인 탑은 본래 통행료를 받기 위해 세운 것이다.그러나 지금은 블타바 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대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다.17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제작된 30개 성인상도 볼거리다. 다리 양옆에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일렬로 늘어서 있는데, 성 요한 네포무크, 성 루이트가르트, 성 비투스 등 체코의 유명한 성인 조각상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그중 성 요한 네포무크 조각상은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전설 때문에 유독 손때가 많이 탔다.
(까를 4세)
(바츨라프 4세)
[프라하 중앙역]
2) 체스키 크룸로프
체코 남부의 보헤미안의 흔적이 서린 중세도시 ..... 체스키 크룸로프(Cesky Krumlov)
체스키 크룸로프는 프라하에서 남서쪽으로 200Km 정도 떨어진 오스트리아의 국경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도시(인구 1만 5,000여 명)로 붉은 지붕과 등근탑이 어우러져 동화와 같은 풍경을 자아낸다. 도심의 절반은 유적과 상점이고 나머지 절반은 펜션, 민박집들로 채워져 있다.
체스키 크룸로프는 S자로 완만하게 흐르는 블타바강이 감싸고 도는, 언덕 위에 위치한 작고 아담한 도시로 짙은 오렌지색 지붕과 둥근 탑이 어우러져 동화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길바닥을 채운 둔탁한 돌길이 정감 있게 다가서며, 주말이면 전통복장을 곱게 차려입고 마을을 서성이는 주민들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체스키 크룸로프는 체코가 공산국가였던 시절에는 그저 낙후된 도시에 불과했으나, 1992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 300여 개의 고딕, 르네상스 건축물이 문화유적으로 지정되었으니 도시 전체가 유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남부 보헤미안지역은 자유롭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중세마을은 300년 동안 커다란 변화 없이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 유구한 풍경 때문에 주말이면 사람들이 깊은 휴식을 위해 몰려드는 곳이다.
체스키 크룸로프 성 인근 역사지구는 다른 중세도시들처럼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미로처럼 얽혀있지만, 이 좁은 길에 아기자기한 수공예품을 파는 상점과 카페가 가득하다. 구시가 등을 둘러보는 데는 걸어서 반나절이면 충분하다. 마을의 관문인 부데요비츠카 문(Budějovická Brána)을 지나면 옛 영주들을 모시던 하인들이 거주했던 라트란(Latrán) 거리가 이어진다. 꼭 특별한 테마를 찾으려 하지 않더라도 도시 자체가 오롯하게 문화유적지라는 느낌이 전해진다. 짙은 오렌지색 지붕과 흰 담벼락은 동화 속 골목을 산책하는 착각을 안겨 준다.
(마을의 관문인 '부데요비츠카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