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 차 ]
1. 피사 → 로마 주변풍경
2. 로마 역사
3. 로마 위성사진 및 관광지도
4. 로마 시내풍경
5. 바티칸 시국 : 박물관 및 미술관, 시스티나 예배당, 성베드로 대성당, 바티칸 광장
6. 팔라티노 언덕 & 치르코 마씨모(전차 경기장)
7. 캄피돌리오 광장 (로마 발상지)
8. 포로 로마노 (로마 공회장)
9. '진실의 입' & 코스메딘 산타 마리아 성당
10. 판테온 신전
11. 트레비 분수
12. 스페인 광장
13.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
14. 콜로세움 &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15.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
16. 기타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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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피사 → 로마 주변풍경
2. 로마 역사
전설에 의하면, 미의 여신 ‘베누스’와 트로이왕의 형제인 ‘안키세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네아스는 트로이의 멸망을 결정한 신들의 명에 따라 트로이를 떠나, 아들 아스카니우스와 추종자들을 이끌고 신들이 약속한 라틴국(현재 이탈리아)에 도착하여 이를 점령한 뒤 라틴국의 공주 라비니아와 결혼하였다. 그의 아들 아스카니우스는 라틴지역의 알바롱가의 도시를 건설하고 그 후예들이 400년간 지배하였다. 알바롱가의 최후 군주 누미토르의 딸 레아 실미아는 전쟁의 신 마르스와 결혼하여 그 사이에서 쌍둥이 형제인 로물루스와 레무스(Romulus and Remus)가 태어났다. 형 누미토르로부터 권력을 빼앗은 횡폭한 군주 아물리우스는 이 두 아이를 테베레 강물에 던져 죽이도록 했으나, 아버지 마르스의 보호 아래 테베레 강의 물결은 아기들을 안전하게 팔라티노 언덕까지 몰고 갔으며, 이때 나타난 암늑대가 젖을 먹여 보호해 주었고, 나중에 우연히 쌍둥이 형제를 발견한 목동에 의해 키워졌다. 한편, 비탄에 잠긴 실비아는 티베르 강에 투신 자살하였다.
탄생의 비밀을 알게 된 두 형제는 아물리우스를 죽이고, 할아버지 누미토르를 다시 왕으로 복위시켰다. 누미토르는 형제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에 감사하여, 기원전 753년 4월 21일 팔라티노 언덕에 새로운 도시를 세웠다. 팔라티노 언덕은 바로 암늑대가 그들을 돌본 곳이다. 그런데 공동의 적을 무너뜨린 후 형제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누가 왕이 될 것인지를 결정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마침내 형제는 분할 통치를 하기로 하고, 로물루스는 팔라티노 언덕에, 레무스는 아벤티누스 언덕에 각각 세력기반을 두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들 간에는 다툼은 재발하였다. 세력권의 경계를 나타내기 위해 로물루스가 쟁기를 이용하여 파놓은 도랑을 레무스가 뛰어 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남의 권리에 대한 침해행위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로물루스는 레무스를 죽이고, 새 도시의 이름을 로마Rome)라고 정하고, 초대 왕이 됨으로써 로마 건국의 시조로서 왕정시대를 열었다. 로물루스 이후 다섯 명의 왕(누마 폼필리우스,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앙쿠스 마르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는데, 로마는 한때 에트루리아인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시벽(市壁)을 갖춘 도시로 발달함과 동시에, 행정개혁을 이룸으로써 크게 발전하였다.
이후 마지막 왕이자 ‘거만한’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역시 에투루리아족 출신으로 왕정시대의 막을 내리고 공화정시대(BC 509년)을 열게 하였다. 즉, BC 6세기 말 에트루리아 계(系) 왕을 추방하고 귀족에 의한 공화정을 실시함으로써 로마는 여러 라틴 도시의 맹주(盟主)가 되어 고대 로마국가의 중심이 될 기초를 닦았다. 현재 ‘종착역’(테르미니) 부근에 그 일부가 남아 있는 세르비우스 왕의 시벽은 BC 4세기의 것으로, 이 무렵부터 로마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는 국가의 중심으로서 발전하였다. 기원전 46년 시저는 독재관으로 임명되었고, 기원전 44년에는 종신 독재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시저가 개인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계속 축적하자 옛 정치동지들의 질투와 시기를 받게 되었는데, 원로원 내부세력과 부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주도에 의해 결국 시저는 암살되었다. 시저가 암살된 후 공화국을 재건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는 기원전 43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옥타비아누스가 제2차 3두정치를 시작하자 무산되었다. 이후 패권다툼이 심화됨으로써 3두정치의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는데, 결국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 승리하였다.
이로써 공화정시대가 막을 내리고 제정시대가 개막되었는데, 이때 아우구스투스의 ‘황금기’가 시작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안정과 평화를 되찾게 하여 로마제국시대의 탄탄한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였으며, 로마 역사상 문화적으로 가장 중요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에술과 도시미학분야가 특히 발달하였는데, 개선문을 포함한 대형 가념관 등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들이 속속 들어섰다.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한 14년 제국시대의 정치적 기반은 이미 확정되었다. 1세기부터 깊어진 정치위기를 일시적으로 극복해야 했지만, 3세기 중엽까지 로마사회는 상당히 활기차고 안정을 유지하였다.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는 그의 양아들인 티베리우스가 줄라아 가문의 대를 이었으며, 그 후 37년부터 41년까지 칼리골라 황제, 41년부터 52년까지 클라루디우스 황제가 제위하였다. 그 다음으로, 등극한 젊은 네로 황제는 정치위기를 진합하려고 강행한 독단적이고 잔인한 정치를 펼쳤는데, 이로 인해 민중의 지지를 잃게 되었다. 결국 서기 68년 원로원으로부터 국가의 적으로 선고 받은 후 그는 자살했다.
68년부터 69년 사이에는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등 세 명의 황제를 차례대로 선출되었는데, 이들의 단기 재임 중에 서로가 서로를 피살하는 극도의 환란이 있었다. 69년에는 팔레스티나 반란을 평정한 플라비아 베스파지아노(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에 즉위하여 플라비아 가문이 시작되었는데, 그는 국가 질서를 회복하고 로마제국의 국경지방에까지 통치력을 강화하였다. 그 후 그의 두 아들인 티토와 도미지아노가 각각 79년과 81년에 즉위하였다. 이 중 도미찌아노는 군사력을 지나치게 보강하고 독단적인 정치를 펴다가 결국 측근들의 내부음모에 의해 알살되었다. 이 시기에 콜로세움, 티토 목욕탕, 도미찌아노 경기장(현재의 나보냐 광장)을 건립한 플라비아 가문의 찬란한 영화는 이로써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한편, 원로원은 자체적으로 황제를 선출하는 데 성공하여 네르바 황제가 즉위하였는데, 그는 단기간 재임하였지만 혁신적인 양자계승방식을 제정하였다. 황제는 원로원의 승인 하에 후계자를 선택할 수 있고, 적임자 평가방식은 인척관계나 가문을 떠나 정치능력과 자질 및 품행을 중요시하였다. 네르바 황제는 98년 사망하기 얼마 전에 그의 후계자로 트라이아노를 지명했다. 트라이아노는 스페인 출신으로 전술에 뛰어난 장군으로 군대 내에서 두터운 신임을 바도 있었다. 그의 19년 재위기간 중 적극적인 군사원정사업을 전개하여 다키아(현재의 루마니아),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를 정복하여 역사상 로마제국의 영토는 최대에 이르렀다.
트라이아노의 양자이자, 후계자인 히드리아누스 황제는 117년부터 138년까지 재임하였는데, 그는 평화적인 정치로 로마제국의 영토와 영화를 보존하는 데 주력하면서, 예술과 그리스 문화에 심취하였고, 로마제국 전역을 시찰하는 장기여행을 감행하였다. 또 이탈리아와 속주의 차별을 없애는 포용정책으로 속주인들에게도 단계적으로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안토니우스 피우스(138~161년)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가 각각 히드리아누스의 뒤를 이었다. 특히,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5현제(五賢帝, five good emperors; 네르바(96∼98), 트라야누스(98∼117), 하드리아누스(117∼138), 안토니누스 피우스(138∼16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의 마지막 황제로서 양자계승방식을 철폐하고 친아들인 콤모두스(180~192년)를 후계자로 지정하였다.
이어, 로마 역사상 최초로 아프리카계 황제인 세티미오 세베로가 황제에 즉위하였는데, 그는 탁월한 군사지휘관으로 정치와 행정을 재정비하고, 속주의 자치권을 인정하면서 잦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로마제국의 방대한 영토를 지키는 데 주력하였다. 211년에는 그의 아들인 카라칼라가 뒤를 이었는데, 바로 이듬해 안토니우스 헌법을 선포하고, 로마제국 영토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세베루스 가문은 알렉산더 세베루스의 죽음(235년)으로 끝나게 된다.
그 후 후계자인 막시미누스 트락스의 재위와 함께 원로원의 권한이 유명무실하고 군대의 권력이 막강해진 ‘군인황제’시대가 시작되어 혼란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270년부터 275년 사이 아우렐리아노 황제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46km에 이르는 성벽을 건립하였는데, 현재까지 많은 부분이 남아있다. 3세기 말엽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0~305년)는 중앙정부의 권력을 강화하고 종교지도자로서 황제의 위상을 부각시켰다. 이로 인해 많은 가톨릭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 가톨릭 신자들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한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정치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4분치제도(四分治制度; 4두 정치제도)를 시행하였다. 즉,
광활한 로마제국을 4개 지역으로 분할하여 2명의 아우구스투스와 2명의 시저가 공동통치를 하도록하였는데, 이 체제가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협정에 따라 305년 황제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분쟁은 계속되었고, 콘스탄티누스가 적수인 막센티우스 황제(재위 306~312)를 폐위시키고 312년에 드디어 평정을 되찾았다[막센티우스는 막시미아누스황제의 아들로서, 아버지가 퇴위한(305) 뒤 제위를 이어받지 못하였으나, 부제(副帝) 세베루스에 대한 로마의 반감을 배경으로 제위를 선언하고 아버지도 복위시켰던 황제였음]. 이듬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밀라노 칙령을 선포해 가톨릭을 정식 종교로 공인하였고, 그 후 가톨릭이 국교로 제정되는 기반을 만들었다. 즉,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막센티우스 왕을 폐위하고 가톨릭을 공인하여 산피에트로 대성당과 개선문을 세운 무렵부터 로마는 제국의 중심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밀라노와 라벤나로 이탈리아반도의 정치적·경제적 중심이 옮겨졌으며, 이후 중세에 걸쳐서 로마는 산피에트로 대성당을 갖는 로마가톨릭교의 중심지로서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337년 사망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가장 중요한 업적의 하나는 재위 말기에 로마제국의 새로운 수도를 ‘비잔티움’(Byzantium)으로 옮긴 것이다. 그는 현재 이스탐불인 ‘비잔티움’을 자신의 도시라는 명칭인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노폴리스, 330년)로 개명하면서, 로마 각지에 산재해 있는 많은 유물과 건축물들을 옮겨와 대대적인 개조 및 조성사업을 펼쳤다. 로마제국의 수도 이전은 지리적으로 정치와 군사 요충지란 이유로 있었으나,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급속히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는데, 서로마제국은 476년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가 황제에서 퇴위함으로써 멸망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동로마를 ‘비잔타움제국’이라고도 부르는데, 로마 역사에서 비잔티움제국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가에 대한 학계의 합의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많은 이들이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최초의 비잔티움제국의 황제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제국의 시작점을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재위 379~395) 황제가 집권하고 가톨릭을 국교로 선포한 시점, 혹은 그가 사망한 뒤 로마제국이 동서로 나누어진 시점으로 보고 있다. 어떻든, 동로마제국은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1000여 년에 걸쳐 존속하였다. 한편, 동로마제국의 멸망시기에 대해서도 몇몇 이견들이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1453년 5월 29일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술탄 메메드 2세(Mehmed II : 재위 1444~1446, 1451~1481)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당한 시점이라는 견해가 가장 우세하다.
962년 신성로마제국(962년에 오토 1세가 황제로 대관한 때로부터 황제 프란츠 2세가 물러난 1806년 8월까지에 걸쳐 독일 국가원수가 황제의 칭호를 가졌던 시대의 독일제국의 정식 명칭)의 성립으로 로마는 형식적으로는 서유럽 가톨릭 세계의 중심지가 되었고, 역대 황제는 대관 때문에 로마로 오게 되었으나, 로마는 교황권과 황제권이 충돌하는 무대를 이루게 되었다. 12세기가 되자 로마·라쵸의 귀족들이 중심이 되어 코무네가 성립되었고, 황제의 지지를 얻어 교황과 자주 대립하였으나, 로마의 코무네는 북이탈리아·중부이탈리아의 코무네처럼 강력한 경제적 기초는 없었고 여전히 산피에트로 대성당을 중심으로 한 종교도시적 성격이 짙었다. 따라서 아비뇽에 교황이 옮겨가 있던 14세기는 로마가 가장 침체했던 시기로 1348년 페스트가 유행했던 무렵에는 인구가 2만도 안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5∼16세기에는 식스토 4세, 알렉산데르 6세, 율리오 2세 및 레오 10세 등의 르네상스 교황이 등장하여 교황의 세속적인 권한이 크게 신장되었고, 그들의 학예보호 시책에 따라 로마는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 이 시대에는 테베레강의 좌안, 바티칸의 대안 부분에 대규모의 도시계획이 이루어져 현재까지 남아 있는 로마 구시가의 기본적인 형태가 만들어졌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일어났던 ‘로마의 약탈’(1527) 때문에 일시적 중단은 있었으나, 로마가톨릭교의 중심으로서 로마의 발전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의 바로크시대까지 계속되었고, 현재까지 남아 있는 많은 궁전과 광장이 건설되었다.이와 같이 ‘교황의 도시 로마’로서, 또 중부이탈리아에 광대한 영토를 가진 교황국가의 수도로서 존재해온 로마는 19세기 이래 공화주의운동과 이탈리아 통일운동에 대하여 가장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이에 교황은 프랑스의 군사력에 의지하여 1849년에는 마치니·가리발디 등의 지도를 받는 시민 공화체제를 붕괴시키고, 다시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된 이후에도 로마와 그 주변을 계속 지배했으며,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는 처음에는 토리노, 다음에는 피렌체에 두었다. 로마가 이탈리아 왕국군에게 점령된 것은 1870년에 이르러 프로이센-프랑스전쟁 때문에 로마를 방비했던 프랑스군이 허술해졌을 때이다.
이듬해인 1871년 로마는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으나, 이에 화가 난 교황은 바티칸 궁전에 들어앉아 스스로 ‘바티칸의 죄수’라고 칭하며 이탈리아왕국과 대립하였다. 그것이 이른바 로마 문제였는데, 문제가 해결된 것은 1929년 무솔리니와 교황 비오 11세 사이에 ‘라테란협정’이 체결되고 바티칸 시국이 성립되어 이탈리아에서 가톨릭교회의 특수한 지위 등이 인정되었을 때부터였다. 로마의 도시로서의 발전은 통일 이탈리아 국가의 수도가 된 뒤 급진적으로 이루어져서 1871년 22만이었던 인구가 1900년에는 40만, 1936년에는 115만에 이르렀고, 그것이 다음 30년 동안에 배로 증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공군의 폭격을 당하였으나, 연합군이 북상할 때는 무방비도시를 선언해서 전쟁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귀중한 문화재가 전화로 파괴되는 것을 모면할 수 있었다.
3. 로마 위성사진 및 관광지도
4. 로마 시내풍경
5. 바티칸 시국 : 박물관 및 미술관, 시스티나 예배당, 성베드로 대성당, 바티칸 광장
바티칸 시국은 로마 북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가톨릭 교황국을 말한다. 19세기 이탈리아가 근대 통일국가로 바뀌면서 교황청 직속의 교황령(교황의 종교적인 지배권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지배권까지 미치는 영토)을 상실하게 되자, 1929년 2월 11일 라테란(Laterano) 협정을 통해 이탈리아로부터 교황청 주변지역에 대한 주권을 이양받아, 교황의 영토 주권을 회복하여 '바티칸 시국'이라는 국가명으로 독립을 선포하였다.
바티칸 시국은 하나의 국가이지만, 국방은 이탈리아에 위임되어 있고 소수의 스위스 근위병을 보유하고 있다. 국명은 그리스도교 발생 이전부터 전해져온 오래된 말로, 티베르(Tiber) 강 옆에 위치한 '바티칸 언덕'을 뜻하는 라틴어 ‘몬스 바티카누스’(Mons Vaticanus)에서 유래되었다.
바티칸 시국은 가톨릭의 총본산인 '바티칸 궁전'을 중심으로 한 박물관 및 미술관, 시스티나 예배당, 성베드로 대성당, 전세계 가톨릭교회와 교구를 통괄하는 가톨릭교회 최고통치기관인 교황청, 카스텔 간돌포(Castel Gandolfo; 로마에서 동남쪽으로 약 30km쯤 떨어진 알바니 구릉 꼭대기에 자리잡은 알바노 호수가 있는 작은 마을)에 있는 교황궁(Pontifical Palace), 여름 휴장지를 포함한 로마 부근의 5개소 및 이탈리아에 흩어져 있는 23개소 등을 포함한 영토를 관할하고 있다.
바티칸이 교황의 거주지로 확정된 것은 1377년부터인데, 이후 현재의 바티칸 시국으로 확정된 1929년까지의 약 550여년 동안은 바타칸과 퀴리날레 궁이 교황청으로 번갈아 사용되었다. 그리고 1309년부터 1377년까지 교황의 '아비뇽 유수'(프랑스 필립 4세가 교황청을 남프랑스의 론 강변의 도시 아비뇽으로 옮겨 교황을 자신의 지배 아래 두었던 사건) 전에는 라테라노 성요한 성당이 교황청으로 사용되었다.
역대 모든 교황들은 세계 카톨릭의 중심지이자, 교황청이란 명칭에 걸맞는 '바티칸'의 발전과 부흥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현재의 자리에 바티칸 시국이 위치하게 되었다. 교황의 옥좌인 성 베드로의 나무의자에는 264명의 교황들이 차례로 앉았으며, 그 중 대다수가 순교했거나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정 문)
1) 박물관 및 미술관
2) 시스티나 예배당
( '시스티나 예배당' 천정에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지창조' 설명판)
( '시스티나 예배당' 벽에 미켈란젤로가 그린 '최후의 심판' 설명판)
( '시스티나 예배당' 천정에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지창조')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 벽에 그린 '최후의 심판')
3) 성베드로 성당
4) 바티칸 광장
6. 팔라티노(Palatino) 언덕 & 치르코 마씨모(Circo Massimo; 전차 경기장)
로마의 유구한 역사를 대변해 주는 '팔라티노(Palatino) 언덕'은 '캄피돌리오'(로마 발상지)와 '포로 로마노'(로마 공회장)가 내려다 보이는 위치에 있다. 푸른 녹지대에 둘러쌓인 팔라티노 언덕은 고대 로마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으며, 역사의 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BC 8세기(753년)에 로물루스가 바로 이곳과 컴피돌리오 광장을 포함한 작은 마을의 토지에 쟁기를 이용하여 로마의 경계를 정하고 초대 왕이 되었다고 한다.
팔라티노 언덕은 고대 로마가 최초로 형성된 직사각형 모양의 중심지였으며, 이곳에 왕궁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후 공화정 시대에는 귀족들이 호화주택지로 사용하였으며, 시저도 이곳을 황궁 자리로 정했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도 황제에 즉위하자마자 이곳에 장엄한 황궁을 건립하엿으며, 이후 티베리우스 황궁, 칼리골라 황궁, 플라비 황궁, 세티모 세베리오 황궁이 차례로 건립되었다.
1500년대에는 찬란한 황궁의 유적지와 그 잔해 위에 파르네제 궁이 건립되었는데, 그 천정에는 카라치가 그린 대작의 천정화가 장식되어 있다. 이 궁에는 별장과 장엄한 티베리우스 황궁의 아치가 받들고 있는 파르네제 부속 정원이 딸려 있었다. 층계를 따라가면 팔라티노 언덕의 유적 중에서도 가장 의미있는 만냐마테르 신전의 잔해를 볼 수 있다. 이 신전은 기원전 3세기에 건립되었는데, 특히 '치벨레 좌상'이 유명하다. 이후 대화재로 모두 손실된 후 바로 재건되었다. 팔라티노 외곽에는 빅토리아 신전(기원전 3세기 초)의 잔해도 볼 수 있다.
팔라티노 언덕 바로 아래에는 '치르코 마시모'(Circo Massimo)라는 전차경기장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 광대한 타원형(664m × 123m)의 경기장이다. 이 지하에는 가히 고고학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유물들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팔라티노 언덕 & 치르코 마씨모) : 관련 책자 스캔자료
(팔라티노 언덕 & 치르코 마씨모 복원도) : 관련 책자 스캔자료
7. 캄피돌리오 광장 (Piazza del Campidoglio; 로마 발상지)
‘캄피돌리오 광장’은 고대 로마의 발상지로 전해지는 7개 언덕의 하나인데, 1547년 미켈란젤로(1475∼1564; 조각가, 화가, 시인)의 구상으로 조성되었다. 큰 계단 위에 전개된 이 광장은 좌우 양쪽의 한 쌍의 건물, 즉 캄피돌리오 박물관(1644∼1655)과 팔라초 콘세르바토리(1564∼1568) 및 안쪽 정면의 시청사(1592년 완성)의 3개 건물로 둘러싸여 있다. 좌우 건물이 마주보는 간격은 투시효과(透視效果)의 조화를 위하여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향할수록 넓어지게 배치되어 있다. 광장 중앙에는 로마의 현제(賢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騎馬像)이 있다. 광장과 건물의 디자인은 그 수법의 독창성과 공간통일(空間統一)의 탁월성으로 해서 미켈란젤로의 가장 뛰어난 건축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 미켈란젤로의 대표작은 물론 피렌체(플로렌스) 메디치 가문의 건축들인데, 그는 1528∼1534년까지 피렌체에 머물다가 다시 로마로 돌아왔다. 이때 그에게 의뢰된 것이 바로 ‘Capital 프로젝트’라는 명칭의 컴피돌리오 광장의 건물군의 입면 디자인이었다.
-카피톨리노 박물관
8. 포로 로마노 (Foro Romano; 로마 공회장)
‘포로 로마노’는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지로, 기원전 6세기 무렵부터 293년에 걸쳐 로마의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였다. 포로 로마노의 고대명은 라티어로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인데, 이곳은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포룸(도시광장)이었다. 처음에는 두개의 연못이 있었고, 카피톨리노 언덕 옆에는 사투르누스와 우르카누스에게 바치는 희생단이 있었다. 그리고 팔라티노 언덕 옆에는 베스타 신전과 무녀(巫女)의 집, 사제장의 집이 있었다. 연못을 샘으로 축소해서 광장을 만들고, 중앙부는 시장, 북서 모퉁이가 시의 집회장(코미티움)이 되고 양쪽 경계에 연단(로스트룸)이 세워졌다.
이후 BC 4세기에 콘코르디아 신전, BC 3세기에 감옥(투리아눔), BC 120년에 콘코르디아 신전개축에 이어서 신축과 개축이 계속되었다. 현재 유적이 확인되는 것으로는 쿠리아(원로원 의원). 바실리카 아에밀리아(BC 179), 레기아(고왕(古王)의 집), 파우스티나 신전, 티우스율리우스 신전, 아우구스투스의 개선문(BC 21), 카스트르와 포르쿠스의 신전, 바실리카 율리아(BC 46), 사투르누스 신전(AD 4세기 재건), 디이 콘센테스의 열주(列柱), 로스트룸(카에사르 및 아우구스투스 재건), 티투스 황제 개선문(AD 28),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개선문(AD 203), 막센티우스의 바실리카(AD 310~313), 웨누스와 로마의 신전(AD 135) 등이 있다. 특히, 티투스 황제 개선문은 티투스 황제가 사망한 후 그의 예루살렘 정복(서기 70년)을 기념하기 위해 원로원의 결정으로 건립되었다. 개선문 내부에서 볼 수 있는 정교한 부조가 특히 유명한데, 그 중 황제의 승전 행차와 유태인 포로 압송 및 일곱 개 촛대가 아름답다. 한편, 포로 로마노의 북쪽에 접해서는 여러 황제의 포룸군(群), 즉 카에사르(B.C. 54~B.C. 44), 아우구스투스(B.C. 40~B.C. 30경), 베스파시아누스(A.D. 1세기), 트라야누스(A.D. 98~112)의 포룸 등이 있다.
이곳은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되고 수도의 기능마저 라벤나로 옮겨지면서, 이민족의 약탈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서로마 제국(285년부터 476년까지 존재한 제국으로 395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완전 분할되어, 생겨난 옛 로마제국의 서부를 통치함)이 멸망한 뒤부터는 그대로 방치되었고, 851년에 발생한 대지진의 여파 등으로 토사 아래에 묻혀 버렸다.
포로 로마노에 대한 발굴작업은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현재의 유적들은 대부분 제정시대 이후의 것이다.
(포로 노마노) : 관련 책자 스캔자료
(포로 로마노 복원도) : 관련 책자 스캔자료
9. '진실의 입' & 코스메딘 산타마리아 성당
10. 판테온(Patheon) 신전
'판테온 신전'은 정면 기둥 위에 라틴어로 새겨진 문구에서 볼 수 있듯이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측근인 아그라파에 의해 건립되었다. 이 신전은 대화재로 파손되었으나, 서기 118년 아드리아노 황제에 의해 재건립했다. 오늘날까지 판테온 신전이 원래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유지할 수 있는 역사적 배후에는 비잔틴의 포카 황제의 공이 크다고 볼 수 있다. 608년 포카 황제는 민속 신전으로 사용되던 판테온을 교황 보니파찌오 4세에게 헌정하여, 카톨릭 성당으로 변형하도록 하였다.
대형 기둥 위에 삼각형 박풍이 있는 정면은 고대 로마시대 신전의 양식을 갖추고 있다. 내부는 원형이며 지름과 높이가 같은 반구형이다. 사실 돔 지붕은 위로 올라갈수록 그 두께가 얇아진다. 천장 중앙에는 8.92미터 지름의 둥근 구멍이 하늘을 향해 뚫려있고, 2천 여년 전 청동장식의 일부가 아직 남아 있다. 완벽한 원형의 장엄한 내부는 천장 중앙에서 들어오는 은은한 자연채광으로 실내를 밝힌다. 천장 중앙의 등근 구멍은 고대 로마시대에 흔히 사용되던 건축양식으로 후세에도 이 양식은 변함없이 사용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벽감(장식을 위하여 벽면을 오목하게 파서 만든 공간)을 장식하던 여러 대형 조각상들이 분실되었고, 중앙 제단과 큰 업적을 남긴 유명 인사들의 추모기념상으로 대체되었다. 그 중 라파엘로의 무덤이 유명하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탈리아 사보이 왕실의 역대 왕과 왕비의 무덤도 있다.
(판테온 복원도) : 관련 책자 스캔자료
11. 트레비 분수
12. 스페인 광장
스페인 광장은 17세기 스페인 영사관이 있던 지역으로, 영화 '로마의 휴일'로 널리 알려졌는데, 이 광장의 137개 계단과 트리니타 데이 몬티 교회(Trinita Dei Monti; 삼위일체교회)의 종탑 및 오벨리스크가 이채롭다. 또한, 여기에는 보트모양의 17세기 대리석 분수가 있는데, 이는 '조각배 분수'라고도 불리운다.
13.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Vittorio Emanuele II, 1820~1878)는 이탈리아의 군주국가 중 하나였던 사르데냐의 제2대 국왕(재위 1843~1861)이었으며, 통일 이탈리아의 제1대 국왕(재위 1861~1878)으로 국부로 찬양되고 있다. 그는 특히 입헌군주제 체제로 행.재정의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그로 인해 사르데냐는 이탈리아 통일의 모체가 되었는데, 이 때 가리발디의 남이탈리아 원정 등을 통하여 이탈리아 통일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14. 콜로세움 &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 콜로세움(Colosseum)
콜로세움의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Amphitheatrum Flavium)'이라고 한다. 플라비우스 왕조 때 세워진 것으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서기 75년 착공하여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에 완성하였다. 본래는 비공식 이름이었던 콜로세움의 유래에 대해서는 원형 경기장 근처에 있던 네로 황제의 거대한 청동상(Colossus Neronis)과 명칭이 혼동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거대하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콜로살레(Colossale)와 어원이 같은 것으로 보아 그 자체가 ‘거대한 건축물’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콜로세움의 위치는 네로 황제가 세운 황금궁전 공원 안에 만든 인공호수 자리였다. 콜로세움 건축에 필요한 인력은 주로 유태인 재수자들을 동원하였다. 그 원래 명칭은 플라비오 원형극장이었는데, 주변에 있었던 네로 황제의 방대한 황실에 비유해 통상 '거대하다'는 의미의 '콜로세움'으로 불렸다.
콜로세움은 오늘날 대형 경기장에 비교할 수 있는데, 관객들이 가장 선호하던 경기는 검투사들의 혈투였으며, 이는 공화정 말기 로마인들의 혈기를 돋구고 정복자로서의 기질을 강화하여 세계 정복을 꿈꾸는 데 한몫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여기에서는 검투사(劍鬪士; 글라디아토르)의 시합과 맹수연기(猛獸演技) 등이 시행되었다.검투사는 상대방을 죽음까지 몰고 갈 만큼 혈투를 하도록 훈련을 받았으며, 검투사라는 신종직업이 생긴 유래이기도 하다. 또한, 각종 맹수와 희귀한 짐승을 잡아 격투에 사용했는데, 지하에는 맹수와 짐승을 가두어 놓은 공간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박해 시대에는 신도들을 학살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피지배계층의 관점이나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는 다소 잔인한 측면이 있으나 고대 로마시민들에게 원형 경기장은 경기를 보며 일체감을 느끼고 그 내용을 즐기는 하나의 공공 오락시설이었다.
- 콘스탄티누스 개선문(Arch of Constantine)
312년 콘스탄티누스 1세의 서로마 통일과 즉위 10년을 기념하여 원로원이 건조하여 315년 봉헌하였다. 콘스탄티누스가 312년 로마에 진군할 때 대낮에 십자가와 "이것으로 이겨라"라는 환상을 전군(全軍)과 함께 보고 막센티우스군(軍)을 티베르강 근처에서 격파했는데, 황제의 그때 싸움 장면이 이 문의 부조(浮彫)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이 사건은 가톨릭과 제국의 통일에 획기적인 것이었다. 높이 21m, 너비 25.7m, 안길이 7.4m로, 본체는 백대리석, 아치 등의 일부에는 색채석을 사용하였다. 정면 기둥 위에 8개의 조상(彫像)이나 벽면 부조 등에는 전(前) 시대의 것을 다른 건물에서 옮겨 그대로 사용하였다. 티투스 개선문(1세기 후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3세기 초) 등과 같은 종류의 로마 모뉴먼트(monument; 기념비, 기념탑, 기념문 등 과거의 사건이나 사업 및 죽은 사람의 유업을 기념하거나 고인의 신령을 제사지내고 그 유품을 진열하기 위하여 세운 건조물)에 비하여, 고전문화의 우아함을 지닌 작품이다.
(콜로세움) : 관련 책자 스캔자료
(콜로세움 복원도) : 관련 책자 스캔자료
(콜로세움 복원도 : 우천시 대형천막 설치) : 관련 책자 스캔자료
(콜로세움 내부 모습) : 관련 책자 스캔자료
(콜로세움 내부 모습 복원도) : 관련 책자 스캔자료
('팔라티노 언덕', '치르코 마씨모', '콜로세움' 지역 복원도) : 관련 책자 스캔자료
15.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
'산타마리아 마조레 성당'은 로마의 4개 성당에 속하는 유명한 성당으로, 다른 이름으로는 ‘바실리카 리베리아나’라고도 한다. 전설에 의하면, 352년 8월 5일 더운 여름날에 교황 리베리오는 꿈에 성모 마리아를 만나게 된다. 성모 마리아는 눈이 내린 자리에 교회를 하나 지으라는 계시를 내린다. 더운 여름에 눈이 올 리 만무하지만, 실제로 교황은 에스퀼리노(Esquilino) 언덕에서 교회가 세워질 만한 곳에 하얗게 눈이 내린 것을 발견하였고, 그 자리에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을 세웠다고 한다. 소성당의 제단 위에 이 ‘눈의 기적’에 관한 내용이 부조로 그려져 있으며, 이러한 전설 때문에 교회는 매년 8월 5일 하얀 꽃잎을 흩뿌리며 ‘눈의 기적’을 경축한다. 교황은 352년에 계시를 받았으나 실제로 성당의 기초를 세운 것은 431년이다. 또 13세기에 개수되었고 그 후에도 여러 번 보수되면서 다양한 건축 양식들을 지니게 되었다. 교회 내부에는 미켈란젤로가 만든 예배당과 지하 묘지에 자리한 박물관이 있다. 우뚝 솟아 있는 높이 75m의 로마네스크식 종루도 멋스러운데, 오래된 기초 위에 1370~1378년 동안 개축한 것이다. 피라미드모양의 뾰족탑은 16세기에 만들어졌다.
16. 기 타 유적지
- 천사의 성
'천사의 성'이란 뜻으로 590년 페스트가 번질 때 하늘로부터 미카엘 천사가 나타나 페스트를 한 순간에 사라지게 했다는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성 꼭대기에 올라가면 이를 기념하기 위한 대리석 천사상도 볼 수 있다. 산탄젤로 성 바로 앞에는 산탄젤로 다리(Ponte Saint' Angelo)가 있으며 성 옆으로는 법원(Palazzo di Giustizia) 건물이 있다.
- 나보냐 광장
- 기 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