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 차 ]
1. 프랑스 지도 및 역사
2. 영국 런던 (세인트 판크러스 역) → 프랑스 파리 (노르드 역) 초고속 해저열차 'Euro Star' 탑승
3. 파리 위성사진 및 관광지도
4. 시내 풍경
5. 노틀담 성당
6. 몽마르뜨 언덕, 사크르퀘르 사원, '화가의 거리'
7. 개선문
8. 콩코드 광장
9. 샹젤리제 거리
10. 루브르 박물관
11. 에펠탑 & 시내전경
12. 세느강 유람선(바토뮤슈)에서 본 주변야경
13. 베르사유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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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 지도 및 역사
1) 프랑스 지도
2) 프랑스 역사
프랑스에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유럽에서도 이른 편에 속한다. 구석기 시대의 여러 문화의 명칭은 모두 프랑스의 지명(地名)에서 유래한다. 도르도뉴현의 크로마뇽에서는 현생 인류의 인골이 발견되었고, 이들 크로마뇽인이 남긴 동굴과 벽화는 남서부지방(특히, 라스코동굴)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BC 1800년경 남서부 지방의 이베리아인, 알프스를 넘어 침입한 리구리아인, 북동부 지방에 이주해 온 벨기에인 등이 청동기 시대를 맞이하였으며 그 뒤 켈트인이 북프랑스로 이동해 들어왔다. 철기 시대에 프랑스 중부는 거의 켈트계 갈리아인에 의해 점령되었다.
(1) 고 대
① 선사시대
전기 구석기시대(약 2만년 전)의 문명은 프랑스 남서부의 뻬리고르 지방에서 발굴되고 있다. 레 재지, 라 마들렌느, 마다질, 크로마뇽, 라스코 등은 이 시대의 대표적인 동굴이며, 동물들(순록, 황소, 메머드, 들소, 말 코뿔소)의 모습이 동굴벽에 그려져 있다.
② 켈트족시대의 골
현재 브르따뉴 지방에 남아 있는 거석 건조물들을 통해 프랑스에 최초로 거주하였던 사람들의 거석문화(civilisation mégalithique)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브르따뉴 지방에는 청동기시대(BC 1800-700년까지)의 유적이 많다. BC 1000년 경 켈트족이 서유럽에 정착하였으며, 이 가운데 현재의 프랑스 지역에 자리잡은 이들은 골(Gaule) 사람이라 불렀다.
③ 로마시대의 골
골은 지중해의 로마 속주로 편입되었다. 오래 전부터 번성했던 농촌의 기반 위에서 도시문명이 확산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프로방스 지방은 많은 도시와 웅장한 규모의 건축물을 보유하고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아를르의 원형 경기장과 극장, 오랑쥬의 극장과 개선문이다. 로마 지배하의 골에서는 초기 형태의 크리스트교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라틴 문화의 영향으로 문학작품을 탄생하였고, 교육이 발달하여 골 사람의 지적 수준이 향상되었다.
④ 프랑크 왕국
5세기에 게르만 족 계통의 프랑크 족이 골을 정복하였다. 클로비스는 프랑크 왕국을 세우고 파리를 수도로 정하였고, 496년에 크리스트교로 개종했다.
⑤ 카롤릭 제국
771년에 프랑크 족(Francs)의 왕인 샤를르마뉴(Charlemagne)는 계속적으로 군사원정을 벌여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으며, 로마에서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서로마 제국의 제관을 받음으로써, 프랑크나 크리스트교의 양면성을 지닌 로마제국이 창건되었다. 한편, 새로운 문화의 출현을 고대하여 성직자와 귀족을 양성하기 위한 학교를 건립하였다.
(2) 프랑스의 탄생
프랑스에서는 카롤링거 왕조가 멸망한 뒤인 10세기 끝 무렵, 파리 백작인 위그 카페에 의해 카페 왕조가 열렸다. 카페 왕조는 처음에는 왕의 힘이 그리 세지 않았으나, 12세기 끝무렵에 필립 2세가 나타나고부터 왕권이 커지기 시작했다. 필립 4세는 성직자의 관세 문제로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와 다투었다. 맹렬한 싸움을 벌인 끝에 교황은 로마 교외에서 프랑스 왕에게 사로잡혔다. 교황은 분을 참지 못해 죽었다. 이 사건 뒤로 교황은 옛날의 영광을 영영 되찾지 못했으며, 로마 교황청은1309년 이후 70여년 동안 남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져 프랑스 왕의 뜻에 의해 움직이는 신세가 되었다(아비뇽 유수, Avignonese Captivity : 1309∼1377년까지 7대에 걸쳐 로마 교황청을 남프랑스의 론 강변의 도시 아비뇽으로 이전한 사건). 그리고 프랑스 왕은 교황의 지배에서 독립되어 한층 강화되었다.
(3) 백년전쟁
14세기부터 15세기에 걸쳐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은 중세기적인 세계관에 사로잡혔던 그 즈음의 전형적인 전쟁이었다. 1328년에 프랑스의 카페 왕조가 무너지고, 발루아 왕가의 필립 6세가 왕위에 올라 발루아 왕조를 열었다. 그러자 영국 왕 에드워드3세는 어머니가 카페왕조 출신이라는 구실을 들어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여 결국 프랑스와 전쟁이 일어났다. 에드워드 3세와 황태자인 에드워드(흑태자)가 이끄는 독립자영 농민으로 이루어진 영국군은 크레시, 푸아티에 싸움에서 프랑스의 기사군을 무찌르고 유리하게 싸움을 이끌었다.
거기에 프랑스 안에서는 국왕파와 부르고뉴파가 대립하고 있어 둘로 분열하여 부르고뉴파가 영국과 손을 잡아 프랑스는 위기에 빠졌다. 이 때 애국소녀 잔다르크(Jeanne d'Arc)가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여 진두에 나서자 프랑스군의 사기는 크게 올랐고, 이 여세를 몰아 오를레앙의 포위를 뚫고 영국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프랑스 궁정에서는 날로 높아지는 그녀의 인기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일부러 성문을 닫아 그녀를 영국군에 넘겨주었다. 결국 그녀는 마술사이고 지금까지의 전쟁공로는 모두 악마의 도움 때문이라는 죄목으로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4) 절대주의 왕권의 성립
독일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은 1520년경부터 프랑스에도 파급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국내에서는 신구 양파의 분쟁이 심해졌고, 16세기 후반에는 여덟 차례나 종교전쟁(위그노 전쟁, 1562-98)이 일어났다. 앙리 4세는 스스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낭트칙령>(1598)을 발포하여 신앙의 자유를 인정함으로써 내란을 수습하였다. 또, 캐나다에 최초의 식민지 퀘백을 개척하고 부르봉 왕조의 기초를 세웠으나, 열광적인 구교도에 의해 1610년 암살되었다. 그의 아들인 루이 13세는 30년 전쟁(1618년부터 1648년에 걸쳐 독일을 무대로 하여 그리스도교와 카톨릭교 간에 일어난 최대의 종교전쟁이며, 최후의 종교전쟁으로 그 기간은 대체로 4기(期)로 구분되는데 전반의 2기는 종교적 색채가 짙고 후반의 2기는 정치적 색채가 짙었음. 독일의 신교도와 구교도 양파의 제후 간의 대립격화 속에서 베멘에서 일어난 신교도 귀족에 의한 합스부르크가의 신성 로마황제 페르디난트 2세에 대한 반란이 전쟁 발발의 계기가 되었음. 신교도측에 서서 덴마크와 스웨덴이 참전한 것에 대해, 구교도측에는 스페인이 참전하였음. 한편, 프랑스는 구교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합스부르크가에 저항하기 위해 신교도측에 서서 참전, 종교전쟁으로서의 양상은 점차 사라졌음. 참혹한 재앙을 낳으면서 광범위한 지역에서 일어난 이 전쟁에 많은 국가가 참여함으로써 전쟁 종결을 위해 열린 웨스트팔리아 강화회의는 세계 최초의 국제회의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었으며, 거기에서 서유럽 국제체제의 틀이 만들어졌음)에도 참가하였으며 절대왕권을 공고히 하였다. 이어 등장한 루이 14세 시대의 프랑스 절대왕정은 그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태양왕이라고 불리운 그는 재상 마자랭이 귀족 반란을 진압한 뒤, 직접 정치를 행했다. 왕권을 강화하고 군사력을 정비하여 그 위세를 크게 떨친 루이 14세는 “짐이 바로 국가이다.”라고 할 만큼 절대군주국가를 이루었다.
한편, 베르사유 궁전을 중심으로 하는 궁정문화가 개화되고, 고전주의 문학이 확립되었으며 파리에는 문학살롱이 문을 열었다. 프랑스는 당대 유럽 최고의 문화국이 되었으며, 이로써 17세기는 ‘루이 14세의 세기’라 불리었고 절대왕권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의 손자 루이 16세는 우둔하고 느리며 정치에 무관심했고,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Marie Antoinette)의 지나친 사치와 낭비로 국민의 신뢰를 상실하였다. 튀르고와 네케르 등을 등용하여 재정위기를 타개하려 했으나, 이것 역시 헛되이 끝나고 1789년 5월 삼부회가 소집되었다. 1789년 7월 14일에는 바스티유 감옥이 시민에 의해 탈취됨으로써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였다.
(5) 프랑스 혁명시대
① 혁명의 원인
가. 모순된 낡은 제도
혁명 이전의 프랑스 사회를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 구제도)이라고 부르는데, 이 사회는 신분상으로 3계층으로 나누어졌다. 제1신분은 성직자, 제2신분은 귀족, 제3신분은 시민과 농민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먼저, 제1신분과 제2신분은 특권신분이라 하여 전 인구의 3%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들은 많은 땅을 소유하고 관직을 독점한데다 세금을 내지 않는 특권까지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제3신분은 도시에 사는 시민과 전 인구의 80%이상을 차지하는 농민으로 이루어졌는데, 시민은 경제력은 갖고 있으나 정치적 권리가 없었고, 농민은 귀족과 지주로부터 받는 여러 가지 부담에 허덕이고 있었다. 더욱이 그 즈음의 프랑스에 유행한 계몽사상은 이성을 근거로 하여 구제도의 모순을 밝히는 동시에 국가와 사회의 이상을 높이 추구했다. 이러한 혁신적인 사상은 신흥 시민계급(부르주아)사이에 널리 퍼져 이들의 계급의식을 눈뜨게 했다.
나. 재정 위기
루이 14세 시대의 침략전쟁과 그의 호화로운 궁전생활로 왕실의 재정이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1774년 루이 16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에는 수습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루이 16세는 재정을 재건하기 위하여 중농주의자인 튀르고와 스위스의 대 은행가인 네케르 등을 등용하여 개혁에 착수했다. 그들은 재정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특권계급으로부터도 세금을 거두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개혁은 궁정과 특권계급의 반대로 실패했다. 재정은 날로 악화되어 루이 16세는 마지막 수단으로 면세특권을 가진 귀족들에게서도 세금을 거두었다. 그러자 귀족들은 재정의 재건과 같은 중대한 문제는 온 국민의 뜻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여, 1614년 이래로는 소집되지 않았던 삼부회의 개최를 요구했다. 그리하여 1789년 5월 베르사유 궁전에 삼부회가 소집되었으나, 성직자와 귀족 및 제3신분으로 갈라져 심하게 대립하여 회의는 열리지도 못했다.
② 프랑스 혁명의 발발
가. 7월 14일 민중 봉기
1788년의 대흉작으로 곡식 값이 뛰어올라, 1789년 7월에는 전에 없던 최고 가격으로 치솟았다. 생활고에 맞닥뜨린 하층시민들의 불만을 누를 길이 없었다. 마침내 파리시민들은 1789년 7월 14일 폭동을 일으켜 군인들 막사를 습격해 32000정의 소총을 빼앗고, 정치범을 가두어 둔 전제 정치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 감옥을 파괴했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의 시작이었다. 바스티유 감옥은 전제정치 전성기에 왕실이나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알맞은 구실을 붙여 가두어 둔 전제정치의 어두운 상징인 곳이었으므로 국민은 이 감옥의 철폐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몇 해 전부터 이를 부셔버리고 광장으로 만들 계획까지 세웠던 것이다. 민중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나자 크게 놀란 국왕은 개혁파 우두머리 라파예트를 국민 의용대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국민들의 비위를 맞추었다. 이 국민의용대원들은 파리를 나타내는 빨강과 파랑 사이에 왕실을 나타내는 흰색을 넣은 띠를 모자에 둘렀는데, 이것이 프랑스 국기인 3색기의 기원이 되었다.
나. 인권선언
프랑스 의회는 전국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8월4일에 봉건적인 특권의 폐지를 결의했다. 이어 8월 26일에는 라파예트가 미국 독립선언(1776)을 기초로 한 인간의 자유·평등 및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골자로 한 ‘인권선언’을 발표했다. 이리하여 파리와 그 지방의 혼란은 점차 가라앉았지만 가을이 되자 다시 물가가 오르기 시작했고, 특히 빵값이 엄청나게 올랐다. 10월 5일 아침 많은 부인들이 파리시청 앞에 모여 '빵을 달라!'고 외쳤다. 그리고 계속해서 국왕에게 진정하기 위해서 베르사유 궁전을 향해서 행진하기 시작했다. 행진대열에는 수많은 시민과 병사들이 합세했다. 그리고 다음날 그들은 강제로 국왕과 왕족들을 파리로 끌고 나왔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전문과 17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미국의 독립선언과 계몽사상의 시민적인 자유주의 경향이 잘 나타나 있다.
제1조,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 및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제2조, 모든 정치적 결합의 목적은 인권을 유지함에 있다. 그 권리란, 자유·재산소유·안전 및 압제에 대한 저항이다.
제3조, 모든 주권의 원리는 국민 안에 있다.
제6조, 법률은 일반 의지의 표현이다. 모든 시민은 법률 앞에 평등하기 때문에 그 능력에 따라서 모든 공직에 고루 취임할 수 있다.
제17조, 재산소유는 불가침이며 신성한 권리이다.
③ 국왕 도피사건
국왕의 도피는 왕후에게 반해 있던 스웨덴 사람 페르젠 백작에 의해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 왔다. 국왕 루이 16세는 1791년 6월20일 한밤에 하인으로 변장하여 가족과 함께 특별히 마련한 대형 4륜 마차로 출발했다. 마차는 5시간이나 늦어서 국왕이 6월 22일 밤 약속장소인 바렌에 닿았을 때는 미리 와서 기다리기로 되어있던 역마차가 떠난 뒤였다. 루이 16세는 자기가 누구인지 거의 숨기지 않았기 때문에 역장의 아들인 드루에에게 들키고 말았다. 국왕이 다시 출발하려 하자 다리가 막혀 있었다. 경종이 울리고 농민들이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22일 아침 국왕가족은 온 마을에서 달려온 국민위병들에게 둘러싸여 파리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1791년 6월 25일 밤 국왕은 죽음의 침묵 속에 병사들이 소총을 거꾸로 들고 두 줄로 늘어선 그 사이를 지나 파리로 들어갔다. 그것은 바로 ‘군주제의 장례식’이었다. 국왕 도피사건은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어, 그 뒤로 국왕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완전히 땅에 떨어져 왕권이 상실되고 말았다.
④ 국왕의 처형
과격한 자코뱅당에 의해 인도된 파리민중들은 8월 10일에 튈르리 궁전을 습격하여 왕을 체포하고 왕권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9월에는 보통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국민공회가 열렸다. 새 의회는 정식으로 왕정의 폐지를 결의하고 제1공화정을 시작했다. 국민공회는 마라·당통·로베스피에르 등이 이끄는 자코뱅당의 진출이 압도적이어서 상층시민을 대표하는 지롱드당과 심하게 대립했다. 그러나 마침내 자코뱅당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자, 1793년 1월에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현재의 '콩코드광장'에서 처형당했다.
(6) 나폴레옹의 등장
① 싸우면 승리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 on Bonaparte)는 1795년에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하여 그 능력을 인정받아, 27세의 나이로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마침내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무찌르고, 1796년에 캄포 포르미오 조약에 의해 오스트리아로부터 네덜란드 일부를 빼앗았다. 이어, 1798년 봄에는 영국의 인도 교통로를 막을 목적으로 이집트에 원정하여 그 땅을 점령했다. 나폴레옹은 가는 곳곳마다 승리하여 프랑스 국민의 그에 대한 존경과 인기가 굉장했다.
② 쿠데타
나폴레옹 해군이 아부키르만 싸움에서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해군에게 패했기 때문에 당분간 이집트에서 고립되고 말았다. 나폴레옹은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혼자 이집트에서 귀국하여 1799년 11월에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일으켜 집정관 정부를 쓰러뜨렸다. 그리고 새로운 헌법을 반포해 3통령으로 이루어지는 통령 정부를 만들고 스스로 제1통령에 취임하여 독재정치를 시작했다. 그는 1801년에 오스트리아와 조약을 맺고, 1802년에는 영국과 조약을 맺어 평화를 되찾으려 했다.
③ 나폴레옹 황제
가. 제정 시작
나폴레옹은 1802년에 국민투표에 의해 종신통령으로 선출되고, 이어 1804년에 또다시 국민투표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나폴레옹 1세가 되었다. 이때부터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제정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는 1804년에 공포된 <나폴레옹 법전>에서 법 앞에서 평등, 개인의 자유 존중, 소유권의 불가침을 제정했다.
나. 유럽 여러 나라 정복
나폴레옹 1세는 영국을 정복하기 위하여 상륙작전을 계획했으나, 1805년 10월에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해군에게 격파되어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나폴레옹은 목표를 대륙으로 돌려 1805년 12월에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오스테를리츠의 싸움에서 무찔러 대륙지배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듬해 1806년에 나폴레옹은 서남 도이칠란트 16개국을 병합하여 라인연방을 조직했다. 이에 962년 이래 계속된 신성 로마제국은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
한편, 라인연방의 성립으로 위협을 받은 프로이센은 중립을 지켜 오던 입장을 버리고 러시아와 동맹하여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예나싸움에서 프로이센군을 무찌르고, 1807년에 틸지트 조약을 맺었다. 그 결과 폴란드에 바르샤바 대공국을 세우고, 북서 도이칠란트에 베스트팔렌 왕국을 세웠다. 그 보다 앞서 예나싸움 후 베를린을 점령한 나폴레옹은 1806년 11월에 대륙 봉쇄령을 내려 영국에 대한 경제봉쇄를 단행하여 유럽 여러 나라로 하여금 영국과 통상하는 것을 금지시킨 것이다.
다. 러시아 원정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폴란드 지배에 나폴레옹이 동의하지 않자, 1811년부터 대륙봉쇄령을 깨고 영국과 통상을 시작했다. 이에 크게 노한 나폴레옹은 67만 대군을 이끌고 1812년에 러시아 원정에 나서서 모스크바를 점령했다. 그러나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린 원정군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후퇴하고 말았다.
라. 엘바섬으로 유배
러시아 원정이 실패하자, 나폴레옹의 지배 아래 있던 유럽 각국의 해방운동이 급속히 고조되어,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유럽 여러 나라는 제4차 프랑스 반대동맹을 결성하고, 동맹군은 1813년에 라이프찌히 싸움에서 나폴레옹군을 무찔러 1814년에 파리를 점령했다. 그 뒤 나폴레옹은 황제자리에서 물러나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다.
마. 100일 천하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유럽의 재건을 위해 1814년에 빈 회의가 열렸다. 이런 사정을 꿰뚫어 본 나폴레옹은 1815년 2월에 몰래 엘바섬을 탈출하여 국민의 환영 속에 다시 황제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해 6월에 워털루 싸움에서 영국과 도이칠란트 연합군에 패하여 대서양의 외딴 섬인 세인트 헬레나섬으로 유배되었다. 이 동안의 나폴레옹의 통치가 약100일 동안 이었으므로, ‘100일 천하’라고 한다.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섬에서 그 일생을 끝마쳤다.
바. 나폴레옹이 끼친 영향
나폴레옹의 유럽 지배는 겨우 15년으로 끝났으나, 그의 원정으로 자유·평등의 사상이 널리 퍼져, 정치개혁운동과 독립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비록 무력으로 유럽을 정복했지만 유럽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7) 제국주의의 시대
19세기가 끝날 무렵부터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미처 개발이 안 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식민지 개척경쟁이 일어났다.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으며, 이때부터 제국주의시대가 시작되었다.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태평양의 작은 섬들까지도 영국·프랑스·도이칠란트가 서로 나누어 가졌다.
1830년에 알제리의 알제를 점령하고 아프리카 진출의 첫걸음을 내디딘 프랑스는 1881년에 튀니지를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사하라 사막에서 콩고까지 진출하고, 훨씬 동쪽에 있는 마다가스카르섬마저 점령, 아프리카를 동서로 가로지르려는 횡단정책을 세우게 되었다. 이것은 아프리카를 남북으로 꿰뚫으려는 영국의 3C정책(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영국이 취한 제국주의적 식민지 확대의 일환으로,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 이집트 카이로, 인도 캘커타를 연결하는 정책을 말함. 세 지역의 머리글자가 모두 C이므로 이렇게 지칭함)과 부딪치는 결과가 되어, 1898년에 '파쇼다 사건'(1898년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과정에서 영국의 종단정책(縱斷政策)과 프랑스의 횡단정책(橫斷政策)이 충돌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프랑스의 양보로 두 나라의 결정적인 대결없이 무마되었으나, 두 나라의 경쟁 관계를 확인하게 되었다.
한편, 안으로는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황제가 되어 나폴레옹 3세라 칭했다. 이 제2제정기는 해외발전의 시대에 해당하는데, 크림전쟁으로 러시아를 압도하고 중국원정, 수에즈운하의 건설, 니스·사보와의 병합 등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또한, 국내의 도시정비, 철도 및 도로의 개설, 파리의 하수도 정비사업 등 현대 국가의 기반을 닦은 것도 이 시기이다. <라 마르세예즈>가 프랑스 국가(國歌 : 작사 및 작곡자는 공병장교 루제 드 릴(Rouget de Lisle)이다. 1792년 4월 프랑스가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트라스부르의 숙소에서 하룻밤 사이에 가사와 멜로디를 썼다고 함. 대의(大意)는 “일어서라 조국의 젊은이들, 영광의 날은 왔다. …… 진군이다. 적들의 더러운 피를 밭에다 뿌리자”로서, 가사는 라인강변으로 출정하는 용사들의 심경을 그린 것으로 노래라기보다는 절규라고 볼 수 있음. 그러나 밝은 선율이 평범하고 호전적인 가사를 완전히 살리고 있어 곧 도처에서 불리게 되었고 이 노래가 정식국가로서 채택된 것은 1879년의 일인데, ‘라 마르세예즈’라는 노래제목은 당시 전국에서 파리로 모여든 의용군 중 마르세유로부터 온 일단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파리로 진군해온 데 연유하며, ‘마르세유 군단의 노래’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가 되었으며, 혁명기념일인 7월 14일이 국경일로 정해졌다.
(8) 1, 2차 세계대전
사라예보 사건(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그의 비(妃)가 현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두 명의 세르비아 청년에게 암살된 사건)을 계기로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에 돌입하였다. 전후의 프랑스는 베르사유체제의 중심국가로서 군축회의·로카르노 조약·부전조약에 참가하는 등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929년 이후 세계공황을 계기로 블룸의 '인민전선내각'이 성립하는 등 좌파와 우파의 대립에 휘말려 나치스 독일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보이지 못하고 <뮌헨협정>에 따라 유화정책을 취해왔다. 1941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폴란드에 침입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다음해 프랑스는 항복하였으며, 폐탱 원수는 나치스 독일에 협력하는 비시정권을 세우고 그 수반이 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런던에 망명한 드골(Charles De gaule)은 라디오를 통해 프랑스 국민에게 <자유 프랑스>의 결성과 항전을 역설하였다. 국내에서도 레지스탕스(Resistance) 운동이 일어났으며, 연합국(미국·영국·러시아)과의 협력 아래 1944년 8월 파리는 해방되었다.
(9) 20세기 중반 이후
① 4공화국(1945∼1958)
전후의 임시정부에 이어 새 헌법이 채택되어 <제4공화국>이 발족하였다, 미국의 원조로 경제부흥을 이룩한 프랑스는 나토(NATO : 북대서양조약기구)의 가입국이 되었다. 드골에 의해 지휘된 임시정부는 공산당을 포함하여 항독운동의 모든 세력들로 구성된 민족적 단일정부로서, 대 민주개혁을 펼쳤는데 여성에게 투표권 인정(1945년), 사회보장제도 창설, 수많은 기업들의 국영화 등이 그것이다. 한편, 프랑스는 미국의 재정원조(마샬 플랜)를 수락하였다. 또한, 식민지와의 충돌이 일어났는데, 인도차이나 전쟁은 독립으로 끝나게 되었며, 알제리 전쟁은 1954년 시작되었다.
② 5공화국(1958∼ )
5공화국은 내적으로는 정부의 권한을 확립하고, 대외적으로는 프랑스의 위신을 표명하려는 드골 장군의 개인적인 권력에 의해 두드러진다. 드골은 미국과의 모든 동맹을 포기(북대서양 조약기구에서 탈퇴)하고, 사회주의 국가들(중국의 인정)과 협정을 맺으며, 제3세계의 ≪독립을 추구하는≫ 국가들에게 호소했고, 경제적인 팽창을 이룩한다. 그러나 경제적인 성장은 사회적인 불평등을 조장하게 되어 1968년 5월에 학생들의 시위가 터지게 되었다. 결국 드골은 물러나고 두 개의 커다란 정치력이 대립한다. 즉, 1958년 이후 권력을 갖고 있는 우파와 대립되는 좌파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1972년 정부의 <코뮌 프로그램>에 조인하였다. 죠르주 퐁피두는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69년부터 1974년까지 많은 사회개혁을 실행하였다.
그 후 우파인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는데, 우파는 드골 지지파와 지스카르파로 나누어졌다. 지스카르 데스탱은 ‘계속성 안에서의 변화’의 후보로서 경제자유주의와 정부역할축소 지지자이며, 쟈크 시락은 수상으로 드골파였다. 1981년 처음으로 좌파인 프랑수아 미테랑이 5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는데, 그에 의해 사회적이고 자유로운 방안들에 대한 선거와 권리행사에 의한 도약정치가 이루어졌다. 1988년 직접 보통선거에 의해 선출된 프랑수아 미테랑은 재차 7년 임기에 착수하였다. 이어 1995년에는 쟈크 시락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리오넬 죠스팽이 수상으로 임명되어 좌우 동거내각을 시작하였다. 2001년에 쟈크 시락이 대통령에 재선되고 2002년 우파가 총선에 다수석을 얻어 프랑스는 우파가 대통령과 수상을 장악하여 우경화로 접어들게 되었다.
2. 영국 런던 (세인트 판크러스 역) → 프랑스 파리 (노르드 역)
초고속 해저열차 'Euro Star' 탑승
3. 파리 관광지도
4. 시내 풍경
(오페라 하우스)
5. 노틀담 성당
6. 몽마르뜨 언덕, 사크르퀘르 사원, '화가의 거리'
‘사크르퀘르 사원’ 은 보불전쟁(프로이센의 지도하에 통일 독일을 이룩하려는 비스마르크의 정책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나폴레옹 3세의 정책이 충돌해 일어난 전쟁)에서 패한 후 행정가 알렉상드르 르장티와 로오 드 플뢰리의 지원으로 프랑스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지어진 비잔틴 양식의 하얀 성당으로 1875년에 착공 1910년에 완공되었다. 노을질 때 핑크빛으로 보이는 성당이 아름다우며 파리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어 성당 앞 계단에서 바라보는 시내 풍경이 일품이다.
7. 개선문(Triumphal Arch)
개선문은 프랑스혁명 후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로마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을 그대로 본떠 설계했다. 로마시대에 개선문 아래로 행진하도록 허락된 자는 영웅뿐이었다. 새로운 땅을 정복한 황제와 그 부하들이 개선문 아래로 개선행진을 하는 것은 대단히 영광스런 일이었다. 파리에서도 4년간의 독일 지배에서 벗어난 1945년, 샤를 드골 장군이 이 개선문 아래로 당당히 행진했다. 개선문은 높이 약 50m, 너비 약 45m로, 외부에는 10개의 부조가 조각되어 있다. 부조는 나폴레옹 1세의 공적을 모티브로 제작된 것이다.
8. 콩코드 광장
'콩코드 광장' 은 동서 길이 360m, 남북 길이 210m로 파리에서 가장 큰 광장으로, 동쪽은 튈르리 공원에 이어지고 북쪽은 루아얄 가(街)를 통해서 마드렌 성당과 마주하며, 서쪽은 샹젤리제 거리와 통하고 남쪽에는 세느강에 걸린 콩코르드 교(橋)가 있다. 광장의 중앙에는 이집트로부터 기증받은 룩소르의 오벨리스크(바로 아래 사진)가 서 있고, 분수와 조상(彫像)이 있다. 18세기에 루이 15세의 명으로 만들어졌는데, 가브리엘이 설계하였다. 중앙에 루이 15세 상(像)이 있어 ‘루이 15세 광장’으로 부르다가 프랑스혁명 때 루이 15세 상이 파괴되고 ‘혁명광장’으로 개칭되었다.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등 1,000여 명이 처형된 곳이기도 하다. 뒤에 다시 ‘화합’을 뜻하는 ‘콩코드’로 개칭되었다.
(인접해 있는 '튈르니 정원')
9. 샹젤리제 거리
‘샹젤리제 거리’는 세느 강(江)의 북안을 따라 전개된 콩코르드 광장에서 북서쪽으로 향해 뻗어 있다. 개선문으로 유명한 드골 광장에 이르는 길은 1,880m의 직선도로로서, 도로의 양쪽에는 마로니에, 플라타너스 등의 가로수가 울창하다. 동쪽은 너비 300~400m, 길이 700m의 산책용 공원이 있으며, 서쪽은 제2제정시대에 개발된 부분으로 원래는 귀족의 저택이 많았으나, 현재는 파리풍(風)의 호텔·레스토랑·카페·극장·영화관·상점들이 늘어서 있고,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는 엘리제궁(宮)을 비롯하여 항공·해운회사·자동차 전시장·고급 의상실 등의 건물이 많다. 예전에는 세느 강의 범람원이었으나 17세기 이후 정비되었다.
(‘생 마들렌 성당’은 세느 강(江)의 우안(右岸), 파리의 콩코르드광장으로 통하는 루이알 거리 끝, 마들렌 광장의 정면에 서 있는 높이 약 30m, 정면 너비 43m, 길이 108m의 로마신전 풍의 대건축물이다. 1764년에 착공되었으나, 중도에 공사가 중단되어 나폴레옹시대에는 기념관이 되었는데, 1806년에 현상공모에서 2등으로 뽑힌 비니옹의 설계에 따라 1842년에 완성되었다. 나폴레옹 몰락 후 다시 성당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외벽 주위에는 코린트식 원주가 있고 성당 내외에는 조각과 회화가 장식되어 있는데, 전벽(前壁)을 장식한 르메르의 조각《최후의 심판》등 유명한 작품이 많다.)
10. 루브르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은 루브르 궁전을 미술관 건물로 사용하고 있으며, 소장된 미술품의 규모는 세계 최대이다. 원래 루브르 궁전에는 역대 프랑스 국왕들, 특히 프랑수아 1세, 루이 13세, 루이 14세 등이 수집해 놓은 방대한 양의 미술품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프랑스혁명 후인 1793년 국민의회가 그것을 공개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미술관으로 정식 발족하고 그 뒤로도 꾸준히 미술품 수집이 계속되어 오늘날의 대규모 미술관으로 변모하였다.
개관 이래 프랑스 미술의 중심적 구실을 하면서 전세계의 미술가나 미술 연구가 및 애호가들이 수없이 찾아들어 파리의 빼놓을 수 없는 명소가 되어 있다. 특히 젊은 화가나 조각가에게 거장(巨匠)들의 작품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미술 발전에 기여하는 의의는 매우 크다. 또한 루브르미술관의 관장(館長)이 전국의 공·사립 미술관 운영을 총괄하도록 되어 있어, 프랑스 미술관 행정의 총본산이기도 하다.
수집된 미술품은 고대에서 19세기까지의 오리엔트 및 유럽 미술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으며, 등록이 완료된 것만 해도 총 20만 점을 넘는다. 작품은 각 부분마다 연대 ·지역별로 분류되어 광대한 루브르궁전의 북동(北棟)을 제외한 거의 모든 건물의 각 층에 배치되어 있다. 회화·공예 부문은 2·3층에, 조각 부문은 1·2층에 진열하고 있다. 또한 19세기 인상파 이후의 회화 부문 역시 루브르미술관 소관인데 그 작품들은 '인상파미술관’에 전시하다가, 1986년에 완공된 오르세미술관으로 옮겨 전시 중이며, 마네의《풀밭 위의 점심》을 비롯하여 모네·드가·피사로·르누아르·세잔·고흐 등 근대 회화에서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화가들의 우수작을 한눈에 볼 수 있다.
11. 에펠탑 & 시내전경
12. 세느강 유람선(바토뮤슈)에서 본 주변야경 (노틀담 사원, 에펠탑 등)
('한국어' 안내 방송이 된다는 표시)
13. 베르사유 궁전(Chateau de Versailles)
‘베르사유 궁전’은 파리 남남서 20km에 있는 부르봉 왕가의 이궁(별궁)으로, 원래 루이 13세가 지은 사냥용 별장이었으나, 1662년 무렵 루이 14세의 명령으로 대정원을 착공하고 1668년 건물 전체를 증축하여 외관을 가로축 부분이 앞으로 튀어나온 U자형 궁전으로 개축하였다. 1680년대 다시 커다란 건물 2동을 증축하고 남쪽과 북쪽에 별관과 안뜰을 추가하여 전체길이가 680m에 이르는 대궁전을 이루었다. 이때 정원 쪽에 있던 주랑을 '거울의 방'이라는 호화로운 회랑으로 만들고, 궁전 중앙에 있던 방을 '루이 14세의 방'으로 꾸몄다. 거울의 방은 길이 73m, 너비 10.5m, 높이 13m인 회랑으로서 거울이 17개의 아케이드를 천장 부근까지 가득 메우고 있고 천장은 프레스코화로 뒤덮여 있다.
베르사유 궁전은 궁정의식을 치르거나 외국특사를 맞을 때 사용되었으며, 화려한 내부장식을 한 '전쟁의 방'과 '평화의 방'으로 이어진다. 전쟁의 방에는 색조 회반죽으로 된 타원 모양의 커다란 부조가 있는데, 말을 타고 적을 물리치는 루이 14세의 위엄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남쪽에 있는 평화의 방 역시 유럽 평화를 확립한 루이 14세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그려져 있다.
1783년 미국독립혁명 후의 조약, 1871년 독일제국의 선언,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평화조약체결이 거울의 방에서 행해지는 등 국제적 행사무대가 되었다. 프랑스혁명으로 가구·장식품 등이 많이 없어졌으나 궁전 중앙부, 예배당, 극장 등을 제외한 주요부분은 오늘날 역사미술관으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프랑스식 정원의 걸작인 정원에는 루이 14세의 방에서 서쪽으로 뻗은 기본 축을 중심으로 꽃밭과 울타리, 분수 등이 있어 주위의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기본 축을 따라 라톤의 분수, 아폴론의 분수, 십자 모양의 대운하 등을 배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