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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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그라나다 : 알함브라궁전(알카사바 전망대, 까를로스 5세 궁정, 여름별장: 헤네랄리페정원),

                              시내 야경




                                                         [알함브라궁전]



건축가들은 인류가 만든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동양(인도)의 ‘타지마할’서양(스페인)의 ‘알함브라궁전’을 꼽기도 한다. 알함브라궁전은 스페인 남부 그라나다지역에 머물던 아랍군주의 저택이자 왕궁으로, 지금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있다.

 

‘알함브라궁전’ 하면 곧바로 상기되는 해는 작게는 스페인, 크게는 세계사를 바꿨던 1492년이다. 이 해에 스페인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첫째, 마지막 이슬람 왕족인 그라나다왕국이 정복되면서 스페인이 이슬람 지배에서 벗어났고 둘째,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연합으로 통합 스페인 역사가 시작됐으며 셋째,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해이다. 한 국가에서의 작은 날갯짓 같은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은 세계질서의 재편이라는 엄청난 의미를 담고 있다.

 

바로 이 해를 전환점으로 해서 스페인은 유럽의 중심국가, 아니 세계사의 주역으로 우뚝 서게되는 것이다. 그런데 스페인의 부흥과 영광이 동트는 바로 그 순간, 스페인의 몰락은 이미 한쪽에서 움트고 있었다. 그라나다 정복 3개월 만에 유대인들의 추방을 명하는 ‘알함브라 칙령’을 발표한 것이다. 가톨릭의 순수성, 이민족의 배제를 골자로 한 이 칙령은 승리의 축배를 들면서 발표했으나, 결국 유대인이 대거 몰려간 네덜란드의 번성과 스페인의 몰락으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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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카사바 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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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를로스 5세 궁전]


까를로스 5세는 스페인 왕 까를로스 4세의 둘째 아들로서, 까를로스파의 첫번째 왕위주창자이다. 그는 1808년부터 1814년까지 프랑스에서 감금되어 있었으며 입헌군주제 기간(1820~23)에 스페인 급진주의자들의 적대감을 사면서 평온하던 삶에 변화가 찾아왔다. 그는 독실하고 엄격한 정통교리 교도였지만, 형인 페르난도 7세가 그로 하여금 자신의 딸 이사벨을 왕위계승자로 인정하도록 강요할 때까지는 아포스톨리코스(극단주의 성직자들)의 제의에 관심을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1713년 펠리페 5세가 제정한, 여성의 왕위계승을 부인하는 살리카 계승법에 따라 자신이 페르난도의 정당한 계승자임을 주장하면서 페르난도 7세의 요청을 거부했다. 스페인의 자유주의자들이 이사벨의 권리를 지지하자 그는 성직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자신은 외국에서 유입된 자유주의적인 입헌주의와 중앙집권주의에 반대하며 군주제와 교회, 그리고 지방자치권의 진정한 전통을 대변한다고 주장했다.

 

1833년 3월 처남매부지간인 포르투갈의 왕위주창자 돔 미겔을 만나기 위해 포르투갈에 갔다가 그곳에서 내전이 일어나는 바람에 1833년 9월 페르난도 7세가 죽었을 때 그는 스페인과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스페인에서 그의 지지자들이 그를 국왕 까를로스 5세로 선포하자 귀국했다. 그는 1834년 7월 바스크 지역에서 까를로스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총사령관인 토마스 데 수말라카레기는 비범한 장군이었으나, 카를로스의 결단력 부족으로 제1차 까를로스파 전쟁의 조속한 해결이 지연되었다. 토마스 데 수말라카레기가 죽고(1835), 까를로스파가 빌바오 장악에 실패하자 주도권은 자유주의자들에게 넘어갔다.

 

1839년 8월 까를로스파의 장군 라파엘 마로토가 베르가라 협약에 서명하고 이에 따라 자유주의자들이 바스크의 합법적 특권들을 승인하자 전투는 대부분 끝나고 까를로스는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아들인 까를로스 루이스 데 보르본이 이사벨 2세와 결혼함으로써 부르봉 가문의 분열상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1845년 자신의 왕위주장을 철회하고 몰리나 백작 칭호를 받아들였으나, 이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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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궁전: 헤네랄리페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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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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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니콜라스 전망대에서 바라다 본 알함브라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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